[조대영의 영화읽기]‘7번방의 선물’
한민국이 판타지 신파에 사로잡혔다. 바보 아빠와 어린 딸의 울지 않고는 볼 수 없는 통속극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형마트의 주차요원인 용구(류승룡)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성남교도소의 7번방에 갇히게 된다. 억울한 것도 억울한 것이지만, 용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어린 딸 예승(갈소원)이와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부터 허구적인 구성물로서의 `판타지’를 차용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망을 그럴듯하게 제시하며 관객들에게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최대치로 선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어린 딸이 감방에 들어가 아빠와 함께 산다는 설정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를! 이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 수 밖에 없는 수감자의 딸을, 수감자인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마련한 극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니, 7번방의 수감자들이 의기투합하여 용구와 예승이를 돕는다는 설정 역시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요소이고, 이들이 수용되어 있는 7번방 역시 현실의 교도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조직폭력배, 사기꾼, 간통범, 소매치기범, 자해공갈범 등의 범죄자들이 별다른 계기 없이 착한 사람이 되어 딸과 아빠의 응원군이 된다는 것도 판타지적이긴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렇게 판타지적인 요소를 전면에 내 새우며 빤한 거짓말로서의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7번방의 선물’이 대단한 것은, 이 허황된 설정들이 어색하지 않게 흘러가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도 이 영화는 이를 돌파해내는 저력을 보여준다.
관객들이 별다른 의심 없이 영화를 따라가게 되는 것은, 예승이가 처해있는 딱한 상황이 관객들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고, 7번방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이 워낙에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서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력이 한몫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나 7번방의 죄수들로 분한 연기자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와 인물해석은 관객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해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여기에다 `7번방의 선물’은, 영리하게도 우리시대의 화두인 `정의란 무엇인가’를 재차 물어보는 장치를 심어놓으면서 관객들을 공분하게 한다. 이는 영화의 무게중심이 단순히 웃기는 코미디에서 사회성드라마처럼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준다.
관객들은, 죄 없이 옥살이를 하고 있는 용구의 편에 서서 그가 죄 없음에 분노하게 되고, 권력의 남용 앞에서 저항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를 보며 측은지심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제 아빠는 불의의 희생양이 되어 딸과 이별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 영화가 어쩔 수 없는 `신파’영화가 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아빠와 딸의 최후의 이별 장면에서, 아빠는 형장의 이슬이 되기 위해 단두대로 향한다. 이때 딸은 숫자를 세 번 세는데, 그 이유는 숫자 셋을 세면 아빠가 뒤돌아보며 애교를 부렸었기 때문이다. 복도 귀퉁이를 돌아간 아빠는 어찌된 영문인지 소식이 없다. 이렇게 부녀지간의 침묵의 이별로 처리되었다면, `7번방의 선물’은 신파영화의 진화라고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데 이 영화는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아빠와 어린 딸의 상봉장면을 기어코 연출해 내며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나쁠 것은 없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자신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다는 신호를 선물받기 때문이다.
이로써 죄 없는 아빠가, 딸을 위해 목숨 바치는 부성애의 신화는 완성된 것이다.
조대영(영화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