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서학동사진미술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전
“나는 이 산이 진짜 좋아예. 꽃이 이렇게 자라는 모습도 너무 이쁘고. 그래서 항상 내가 들다보고. 고추나무를 만지고 하다보면 참 니하고 내하고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고추 다 따고 철거할 때는 다음에 또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좋죠. 내 논에서 나도 이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곡식을 가꿀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죠. 힘들게는 살았지만 너무 좋아요. 지금은.”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투쟁 17년.
2005년 밀양시 상동면 주민들의 첫 집회로 싸움이 시작됐고, 2014년 6월11일 행정대집행 이후 결국 송전탑이 세워졌다. 마을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주민들은 지척에 존재하는 765kV송전탑으로 고통 받고 있다.
밀양송전탑 반대 17년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싸움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대규모 초고압 송전탑 경과지 4개 면 주민 111세대가 아직 합의하지 않고 있다. 더이상 방패를 밀고 당기는 싸움은 없지만 밀양송전탑 반대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든 기록들을 모아 2021년 12월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투쟁 온라인 기록관’(http://my765kvout.org)을 개관하고 기록사진 일부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말 없이 싸워도’란 전시명으로 전주 서학동사진미술관(3월8∼4월3일)에 내걸었다. 강유환, 권하형, 노순택, 박승화, 이승훈, 이재각, 정택용, 조재무, 주용성, 한금선, 최형락씨 등 이 싸움을 카메라에 담았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전시를 기획한 이재각 작가는 “17년간 밀양에서 벌어진 일을 사진으로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아직 합의하지 않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고,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여전히 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시의 취지를 설명했다.
사진들은 말 그대로 전쟁터 같았던 밀양을 보여준다. 거대한 철탑과 진압 경찰, 한전 직원들, 하늘을 휘젓는 헬기, 거대한 포클레인 바퀴 사이에 쭈그리고 누운 할머니, 쇠사슬을 목에 친친감고 있는 주민들, 산속 움막…. 그러나 폭력에 대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힘겨운 시간을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노래와 밥이었다. 가지런히 놓인 국과 밥숟갈, 컵라면, 그리고 함께 먹는 장면.
“이 쇠사슬을 보면요, 폭력에 대한 기억밖에 없잖아요. 그죠. 근데 쇠사슬만 있는 게 아니에요. 누룽지도 있고요. 고구마도 있고, 라면도 있어요. 같이 먹었어요. 연대자들 하고 같이 먹었던 그때, 그 힘으로 지금까지 가는 것 같아요.”
“아픈 사람끼리 기대니 덜 아프다”
산나물 비빔밥 양푼에 모여든 나무등걸 같이 거친 할매들의 손이 지금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일상이 투쟁인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임을 사진들은 보여준다.
“데모하러 가던 길, 그라고 그 길에 있던 나무, 그 길 따라 쭉 가믄 산, 산에 구름도 있고, 그라고 그 길에 내가 있지.”
자연의 일부로, 자연에 기대어 평생을 살아온 마을주민들은 송전탑 반대싸움을 위해 산속 움막에 있을 때도 산과 나무, 나비와 새, 산속 생명들과 연결돼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싸우고 저항하는 이 일이 비단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산속 움막 앞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저 멀리서 커다란 바람이 밀려 올라왔다. 타오르는 그 역동적인 움직임이 들렸다.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저항. 나무와 산새들, 산을 가로지르는 바람마저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었다. 숲을 지키는 정령들. 그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이 땅을 수호하는 신령이었다.”
이재각 작가는 전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통해 그 안에 깃든 생명들과 하나가 되어 십수 년 동안 싸워온 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밀양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버티며 살고 있다고.
“우리보다 더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더라고. 죽어봐야 저승을 아나. 핵발전소 문제, 송전탑 문제. 다 전기 문제 아니가. 괴로운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 우리가 세상을 배운 기라. 우리만 아픈 기 아니라 다들 저래 아프고, 아픈 사람끼리 기대니 덜 아프다 카는 거를.… 내 힘닿는 데까지는 하고 싶은 거라. 말없이 싸워도, 싸우는 것은 싸우는 기지. 니는 우예 사노?”
글=임정희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