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영의 영화읽기] ‘장고: 분노의 추적자’
전작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 히틀러와 괴벨스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침몰시켰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장고 : 분노의 추적자’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으로 돌아가,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던 백인들을 초토화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타란티노의 반골기질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백인인 그가 자신의 조상들을 욕보였기 때문이다.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1966년에 프랑코 네로가 주연한 ‘장고’에서 제목과 주인공 이름을 따왔다. 두 영화는 주인공의 이름이 모두 장고고, 아내와 관련하여 피의 복수극을 벌인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닮은 곳이 없다. 그러니까 타란티노는 너무나 유명한 캐릭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이다. 변주만이 아니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 내공을 끝없이 펼쳐 놓기 때문이다.
먼저 꺼내든 카드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영화’의 21세기적 부활이다.
1970년을 전후하여 할리우드에서 흑인 영웅을 등장시켜 흑인 관객들을 매료시켰던 유행을 오늘에 되살려 내고 있는 것이다.
타란티노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어딘가로 끌려가던 장고(제이미 폭스)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장고는 이제 ‘프리맨’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인이 되었고, 그는 자유로운 패션에다 멋스러운 선글라스를 끼고 말에 올라탄 채 ‘백인사냥’에 나서는 것이다.
‘백인사냥’이라고? 그렇다. 그의 여정은 현상금을 타기 위한 여행길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반경은 흑인노예들을 못살게 굴었던 백인들을 소탕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니까 타란티노는 흑인관객들을 위한 최상의 영화서비스를 마련한 것이다.
타란티노식 유머 역시 빛을 발한다. 크게 세 장면이 눈에 띈다.
하나는, 인종차별주의적 극우비밀조직인 KKK단이 슐츠(크리스토프 왈츠)와 장고를 죽이려고 모였다가, 두건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다며 입씨름을 하고 있고, 두건을 만든 부인의 남편은 삐져서 자리를 뜨는 상황을 말한다. 타란티노는 기존의 영화들에서 잔인한 행동과 단결된 모습으로 그려졌던 KKK단을 분열시키고 해체시키는 유머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악당 중의 악당인 캘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관련해서도 쓴웃음이 나긴 마찬가지다. 장고일행이 캔디농장을 방문했을 때, 그는 흑인 노예들 간의 처절한 격투를 낄낄거리며 지켜본다. 이 설정은 노예시장에 비싼 값에 팔려 나간 만딩고족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1975년 작인 ‘만딩고’를 호출하고 있는 대목이다.
타란티노가 단순히 기존의 영화들을 자신의 신작 속에 녹여내는 것에만 그쳤다면, 그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낼 순 없을 것이다. 그는 오락영화의 외피 속에 ‘원칙’과 같은 가치를 치밀하게 새겨 넣는 것 또한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킹 슐츠와 캘빈 캔디가 흑인노예를 사고파는 거래를 끝낸 후 ‘악수를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라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로 대립한다. 캔디는 악수를 해야 계약이 공식적으로 성립된다는 남부의 전통을 들먹이고, 슐츠는 자신은 독일인이니 그 전통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버티는 상황이다. 이때 슐츠는 캔디를 사살하고 자신 또한 죽음을 맞이하며 고집을 사수해 낸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스스로들에게는 엄청난 것인 자존심을 지키려는 자들을 주의 깊게 다루는 것이다. 이 대목은 타란티노식 유머의 정수라 할만하다.
캔디농장의 집사인 흑인 노예 스티븐(샤무엘 잭슨)을 그려내는 것에서도 타란티노의 인간탐구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겉은 흑인이지만 속은 백인이 되어 온갖 아첨을 일삼는 인물을 통해,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 노예도 있었음을 섬뜩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읽을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관객들을 흥분시키는 영화다.
조대영 (영화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