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이 사랑까지 이어지면 온힘(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떠나버린 사랑에게는 밥 한 그릇 줄 수 없고, 사랑 한 숟가락 줄 수도 없다. 마음은 애가 타고, 그 애는 깊고 절실하다. 먹일 수 없는 밥을 담고, 줄 수 없는 사랑을 준비할 때, 그 마음은 애틋하다. 하지만 나의 애틋한 마음이 너의 마음에 닿으면 감동으로 다가온다.
오월 어머니, 그녀들은 어느 젊은이의 어머니였고, 어느 젊은이의 아내였다. 80년 5월 힘부림(권력)의 총칼에 떠나보낸 자식과 남편 때문에 더는 어머니 노릇도 아내 노릇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오월의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 어머니 노릇과 아내 노릇을 한다. 42년 동안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면서.
일흔이 넘고 여든이 넘은 그녀들의 세월은 트라우마를 이겨내기에 아직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녀들의 노래와 그녀들의 노래에 묻은 사연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트라우마에 쌓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의 트라우마를 위로했고, 손을 흔들며 우리의 트라우마를 어루만졌다. 뒤바뀐 처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목소리마저 늙어버려 목놓아 부르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의 사랑은 가지런한 목소리로 한 가락 한 소절로 가슴을 찔렀다. 마치 그날의 칼부림이 광주를 찌르듯이. 그녀들은 서러움으로 가려진 애틋함을 가슴으로 노래했고, 죽은 자에게 줄 수 없는 한없는 사랑을 고스란히 관객의 가슴에 안겼다. 어쩌면 무대와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 손사래를 칠 법도 했을 텐데 다시 용기를 냈고, 어쩌면 잊고 싶었던 이야기에 고개를 돌렸을 법도 했을 텐데 다시 눈물을 삼켰다.
그녀들은 부축받아야 할 나이였다. 혼자 서 있기도 벅찼고, 혼자 노래하기도 힘들었다. 함께 노래해 준 짝꿍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했고, 짝꿍의 손을 꼭 붙잡고 버티며 노래했다. 그녀들의 걸음걸이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부축했고, 그녀들의 눈빛은 오히려 우리의 눈물을 부축했다.
80년 오월에는 예측하지 못한 죽음 앞에 서러웠고, 그날 이후 예측하지 못한 또 다른 서러움들이 밀려들어 슬퍼할 새도 없었다. 그 서러움들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하여 지금 그녀들은 끊임없이 서럽다. 그런데 우리는 <오월 어머니의 노래>의 끝을 예측할 수 있어서 더 서럽고, 그 예측된 서러움의 끝을 바꿀 수 없어 눈물로만 대답했다. 감히 손뼉도 크게 칠 수 없었다.
오월 어머니의 세월에 덧입혀진 트라우마는 노래가 되어 우리에게 말했다. 흥겨운 5월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아직도 질질 끌려가는 민주의 주춤거림을 다만 버티고만 있지 말라고. 노래 속에 서러움과 세월을 묻혀 알려주었다. 오월 어머니는 가슴으로 노래했고, 우리는 가슴으로 들었다. 오월 어머니의 노래는 그윽하게 다가와 감동으로 채웠고, 차분하게 밀려들어 공감으로 채워졌다.
무대 경험만 내세우며 ‘보라’고 강조하는 우격다짐 공연과 달랐고, 과거만 밀어 넣으며 ‘알라’고 떠드는 언론과 달랐다. 노래를 빛나게 해준 연주 또한 내 말을 ‘들으라’며 튀는 정치인과 달랐다.
노래 한 소절부터 생각하게 했고, 몸짓 하나까지 느끼게 했다. 누구도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으나 아픔이 감동으로 다가왔고, 누구도 미래를 말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저절로 다짐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 음악회의 감독은 우리에게 사랑 한 숟가락의 귀함을 깨닫게 했다. 감독은 김동찬이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공식이 있다. ‘모르면 물어보고 해야지’, 물어보면 ‘넌 그것도 모르냐?’ 안 물어보면 ‘모르면 물어보고 해야지’. 끊임없는 도돌이표로 미루기만 한다. 또 ‘너는 꼭 시켜야 하냐?’, 스스로 하면 ‘그걸 왜 니 맘대로 해?’, 가만있으면 ‘너는 꼭 시켜야 하냐? 알아서 해야지’. 나부랭이 말만 끊임없이 나부끼며 떠넘기기만 한다.
알맞게 물어봐야 하고, 알맞게 알아서 해야 하는 일들은 2배, 3배 더 어렵다. 그런데 <오월 어머니의 노래>는 해냈다. 그녀들의 건강이 허락한다면, 전국 순회공연, 세계 순회공연을 했으면 좋겠다. 그녀들의 5월이 우리들의 5월이 될 때까지.
김요수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감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