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두 번째 오월-01] 오월 시민군 김동수 어머니 김병순
“항시 지달렸제. 꼬옥 돌아올 것만 같은 맘이 들었제. 긍께 배깥에서 찻소리만 나문 담박질 치고 댕갰어. 우리 아들이 행이라도 택시라도 타고 오는가 싶은께.”
김동수 열사의 어머니 김병순(87)씨. 80년 오월 이후 내내 옷주머니 속에 오천 원이든 만 원이든 택시비를 담아두고 살았다.
“행이라도 택시 타고 왔는디 돈이 없으문 어찌까 하고, 택시비를 개비(주머니)에다 항시 너갖고 댕갰제. 팽소에도 즈그 아부지가 돈 없어도 여그 오문 뭔 돈이 되든지 있응께 다급한 일 생기문 택시를 타고 오니라, 그러코 애기들한테 당부했거등. 긍께 돈 없으문 행이라도 그냥 왔을 것 같애서 항시 돈 안 떨어치고 택시 타고 올 돈맨치는 넣고 댕갰제.”
반복되는 ‘행이라도’란 말 속에 오래 품었던 실낱 같은 희망과 간절한 바람이 그대로 박혀 있다. 기다리는 마음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낮에만 담박질 친 거이 아니라 팽야 잠 못자고 있응께 한밤중에도 찻소리만 나문 담박질을 해. 헛수고를 하고 댕긴다고 즈그 아부지한티 소리도 많이 들었제.”
그 세월이 십수 년이었다.
“그냥 미쳐갖고 댕기는 식이제.”
“무단한 짓거리”라는 걸 어쩌면 스스로 알면서도 그칠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보도사도 못했어.”
그해 오월에 죽어 망월동에 묻혔지만 시신을 확인 못한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끝내 믿을 수 없었다.
“긴가아닌가 싶었제. 지문 찍었응께 틀림없다고들 한디, 내 눈으로 안봐서 근가 지금까지도 행이나 해져. 엄마가 눈으로 봐불어야 잊어분다고 아들 동채가 망월동에 데꼬 가서 거그 걸어진 오일팔 때 사진들도 보여주고 동수 사진도 보여주더만. 그러고 나서야 ‘행이나 택시 타고 오까’ 그 생각을 작파를 했제.”
허망한 기다림은 작파했지만, 여전히 아들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참꽤도 숨고 들꽤도 하고….”
여전히 농사를 붙들고 있는 이유도 아들 동수에 닿아 있다.
“가만히 있으문 벨것도 다 떠오른께, 시간 때울라고. 일에다 집중하문 생각이 덜 난께 농사도 짓고 밭도 벌고. 생각을 안한 것이 존께 막 걸어댕개.”
작년까지는 닷 마지기 밭을 농사지었다.
“올해는 졸였어. 서너 마지기로. 마음은 암시랑안한디 해보문 틀려. 고까짓것 한디 힘들어.”
장성 서삼면 장산리, 집마당엔 철쭉꽃이 한창이다.
“한하고 철철이 꽃이 피제. 인자 카네이션도 곧 피고…. 동수 아부지가 숭겄어.”
‘아들은 갔어도’라는 말은 생략하고, 어머니는 “동수 아부지제, 팽야”라고 말한다.
5월27일 새벽 도청 지키다 계엄군의 총탄에 산화
“동수 났을 때 온식구 대소가가 좋아했제. 집안에 아들이 귀했어. 근디 그 아들을 시상에나 전두환한테 뺏겨불고. 전두환 그놈이 살아생전에 자백을 해야 헌디 그냥 죽어불어갖고 원이 안 풀려.”
김동수 열사는 4남2녀 중 큰아들이었다. 고향에서 서삼국민학교와 장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로 가서 고모 집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다.
조선대부속고등학교 시절부터 광주 향림사, 관음사 고등부에서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고, 1978년 조선대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뒤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에서 활동했다.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민주화운동에도 열심이었다.
1980년에 대불련 전남지부장이었던 그는 광주 지역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의 진행 부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준비하던 중 오월을 맞닥뜨렸다. 예비검속자로 수배된 것으로 판단한 그는 5월19일 친구들과 함께 일단 목포로 피신했다. 하지만 부처님오신날인 5월21일 광주에서 내려온 차량 시위대로부터 계엄군의 학살 만행 소식을 듣고 그 길로 광주로 돌아와 시민들과 함께 했다.
“동수가 책임감이 강했제. 목포까지 갔는디 친구들한테 말도 안하고 혼자 광주로 와불었어. 혼자 피란나가선 안된다고 생각했던 개비여, 도로 돌아온 것 보문. 친구들은 그때 못 틀어잡은 것이 아숩다고 그래. 서울 사는 그 친구가 오월이문 해마다 와. 동수 추모제에 와.”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며 살고자 했던 불자로서 광주가 겪는 고통과 절망과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말없이 홀로 ‘광주행’을 결단한 것은 친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광주에 도착한 그는 효천동 고모 댁에 전화를 하였다.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통화였다.
그가 전남도청 항쟁지도부 학생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며 했던 일들은 누구도 쉽사리 하지 못하는 시신 안치였다.
그리고 항쟁의 마지막날이 왔다. 그는 끝까지 남았다. 그때 도청에 남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야.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지.>(홍희담 ‘깃발’ 중)
시민군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광주를 껴안고 지켰던 그는 5월27일 새벽 4시30분경 계엄군의 총탄 세 발을 맞고 스러졌다.
작년에 옛 전남도청 별관에서 열린 ‘노먼 소프 기증자료 특별전’(5.7∼7.31)에서 김동수 열사의 사망 사진이 41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당시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사진기자였던 노먼 소프는 5월27일 아침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한 직후인 7시30분에 현장을 최초로 촬영했다. 열사는 전남도청 2층 강당 무대 뒤편에서 발견됐다.
살 수 있는 선택 물리치고 끝까지 이타행
“난리나자마자 끄집어왔으문 쓰꺼인디…. 난리 지난 뒤에도 아무 기벨이 없응께 즈그 아부지는 동수 찾으러 나가서 이틀만에도 오고 사흘만에도 오고 나는 그때 모 숭굴 때라 일이 많애서 가도 못하고. 놈의 집 모 숭구러 갔다가도 점심 묵을 때 되문 행이나 뭔 소식 있는가 집에 담박질로 왔다 가고.”
아들 동수를 찾아 아버지는 친구들의 집은 물론 아들이 자주 다녔던 무안과 광주의 사찰 등을 헤매 다녔다.
사망자들의 지문 채취를 하다가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을 면사무소로부터 전해 들은 것은 6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난리 끝나고 ㅤ며칠이 지나서 망월동에서 찾았제. 모 숭구러 갔는디 싯째가 나를 델로 왔어. 갈 디가 있응께 가야 한다고 그 말뿐이여. 면에서 기벨이 왔는디 오다가 충격받아서 내가 쓰러질깨비 말을 못하고. 긍께 집에 와서사 시어무니한테 들었제. 망월동에 달려갔는디 얼굴을 보도사도 못하고 아무 증명도 없고 지문을 찍어갖고 기라근디, 그때 내 생각에는 긴가아닌가도 싶으잖애. 근디 다시 파서 보자고 하꺼이여 뭐하꺼이여. 식구들이랑 친척들이 나한테 그래. 행이나 파서 얼굴 볼 생각은 말으라고. 그때 망월동에서 어떤 사람은 파서 얼굴만 볼란께 파도라근디 비쳐줄 사람이 누가 있으꺼이여. 그 사람도 궁글고 뚜들고 난리를 해도 뫼를 파주지 않응께 묏을 다 쥐어뜯어불고 해도 못봐 못봐.”
아들은 참혹한 시신이 되어 청소차에 실려와 망월동에 매장돼 있었던 것이다. 단주와 대불련 배지, 수강신청서 용지도 ‘김동수’를 증명했다. 그 외에 시계와 동전 몇 개가 유품의 전부였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평소에 열사가 자주 했다는 말이 산자들에게 남겨졌다. 1992년에 만들어진 ‘지광(知光) 김동수열사기념사업회’는 조선대학교와 장성 서삼초등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세우면서 이 말을 새겼다. 끝끝내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간 짧은 생애다.
망월동 구묘역에서 1995년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열사의 묘비에는 ‘卍’(만)자와 “이땅의 밑거름이 되고자 스스로를 불사른 꽃다운 혼 여기 고이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오월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불살라 시대의 등불이 된 스물셋 청춘. 그에겐 살 수 있는 선택이 여러 번 있었다. 목포로 피신했을 때 광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고, 전남도청의 마지막날을 앞두고도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마음으로 광주로 달려왔고, 끝끝내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다. 김동수열사기념사업회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조선대학교는 김동수 열사를 추모하고 그의 보살정신을 계승하는 추모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년 5월22일 열린 41주기 추모문화제는 그가 산화한 옛 전남도청에서 치러졌고, 이상호 작가가 그린 ‘김동수보살도’도 공개됐다. 한손엔 연꽃을, 한손엔 버드나무가지가 꽂힌 정병을 든 모습으로 그는 산자들 앞에 다시 돌아왔다.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어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을 상징하고 왼쪽에는 연꽃을 들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오월의 광주에서 민주를 꽃피운 열사를 표현했다”고 작가는 말했다.
이상호 작가는 처음엔 한손에 시민군을 의미하는 총을 그려넣었다가 불자인 김동수 열사의 생전의 뜻을 기려 정병으로 고쳐 그렸다고 한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한강 <소년이 온다> 중)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이들이 도청의 마지막날 쏠 수 없는 총을 들고 도청을 지켰으리라.
“그때 잠깐 보고 쭈욱 못 보다가 그 난리가 나붓서”
“그 햇수를 어찌고 살았는가 몰라 그 징한 꼴을 보고. 오월이나 안 닥치문 쓰겄어.”
방 벽에 걸린 4월의 달력 앞에서 어머니는 말한다.
오월은 어머니에게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 늘 전쟁처럼, 불의의 기습처럼 ‘닥치는’ 것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이 웬수여.”
국가라는 가해자, 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망가뜨린 국가폭력을 향한 절규 같은 말이다.
“한나 갖고도 웬순디 나는 둘을 대한민국에 당했어. 시아부지는 육이오때 마흔 몇살 나이로 돌아가셨어. 더 험상시롭게 한 사람도 살았다는디 경찰들이 나오라근께 나가갖고 요 동네 앞에서 열 명을 따발총으로 그냥 사살을 해분께…. 죄없응께 뭐 피란을 가야 하고 남아있다가 경찰들이 산중이라 공산당이나 손잡은중 알고 나오라근께 나가갖고 돌아가셨제. 우리 집안식구 대소가가 다섯, 타성들 다섯. 긍께 요 동네는 하랫저녁에 열 명 제사를 지냈제. 그날이 음력 섣달 열야드레. 인자 모다 떠나고 큰집 작은집 두 집만 남았어.”
6·25전쟁 와중에 시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시집와서 이야기로 들었제. 그때 남편 나이는 열야답. 우리 시어마니도 겁나게 속상한 꼴 많이 보고, 못살 시상을 살고 가겠어. 11남매 중에 자식 야달을 애릴 적에 병으로 몬자 보내고. 난리통에 남편이 돌아가시고 또 난중에는 큰손주가 그리 되고.”
굽이굽이 한맺힌 세월을 허청허청 건너온 시어머니는 아흔 살에 가셨다.
“나는 여그서 여그로 시집왔어.”
고향인 황룡면에서 서삼면까지는 이십리 길이었다.
“거그도 겁나게 산중인디 여그는 더 산중이여.”
가난한 집이었다.
“겁나게도 고통시론 시상을 살았어. 본땅은 없고 문중땅 벌고. 없이 살아도 즈그아부지는 놈한테 둘리들 않고 살라문 아그들 갈쳐야 한다고, 눈은 떠줘야 한다 해갖고, 우리 아그들은 어찌케든 대학을 다 보냈어.”
4남2녀 자식들의 마음이 하나같이 바른 것이 어머니의 긍지이고 힘이었다. “우리 아그들은 다 순해. 한나도 싸납고 독하들 못해. 성제간에도 큰소리 한번 안하고 동네 아그들하고도 쌈박질이라곤 없어. 우리 아그들은 놈한테 낮은 소리 안 들어. 동수도 여그서 중학교까지 다니드락 속 쌕인 일이 한번도 없어.”
어머니는 ‘나쁜 소리’라 하지 않고 ‘낮은 소리’라고 말한다.
동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80년 2월이었다.
“그때 대소가에서 웃대 한아부지 묘소 산일을 했어. 거그서 밥 묵고 저문연에사 내려온께 동수가 왔었등갑서. 낮에 일은 못했어도 들여다보기는 해야 한다고 친구 둘하고 와서 큰집에서 저닉밥 묵고 간다고 나오더드라고. 동수가 주말에도 방학에도 봉사활동 같은 거 댕이니라고 항시 바빴어. 그날 친구들이랑 서이 감서 이참에는 닭 묵었응께 다음에는 소랑 잡으시오,라고 장난말을 하더라고. 그때 잠ㅤㄲㅘㄴ 보고 쭈욱 못 보다가 그 난리가 나붓서. 그 질로 못봐불었제.”
동수랑 같이 얼굴 맞대고 밥을 먹은 것은 그해 설날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고모집가 몇 년 살다가 가분께 우리 아들 밥 한끄니 못믹여 보낸 것이 원이여. 따순 밥 한번 못 채려준 것이 젤로 한이여. 그러코 갈 것을.”
“경찰들이 뒷을 죄고 쭉쭉쭉 따라댕개”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의 삶을 오월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았다. 오월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감시도 창살 없는 감옥처럼 힘들었다.
“광주서 어쩐지도 모르고 그 일을 당했는디, 아무 죄도 없이 우리 아들이 폭도로 몰린 것도 억울한디, 한 사오년을 졸졸졸 따라댕김서 감시를 하더라고. 경찰들이 뒷을 죄고 쭉쭉쭉 따라댕개. 행이나 어디 가서 데모했는가 하고 거그 안 갔냐고 괴롭히고. 어찌고 심하니 감시를 해갖고 지금이라도 그때 그놈 앵기문 뺨사댕이라도 쳐불고 싶어. 광주에서 생질녀를 여워서 갈라고 한디 또 뒤를 캐. 기가 맥히제. 동네사람들이 또닥또닥 결혼음식을 장만한디, 내가 오죽하문 낼아침 일곱 시에 출발한께 갈라문 그 차 타고 같이 갑시다라고 말했어. 저도 염치 없응께 난중에 따로 왔더만. 한번은 하도 열불이 나서 우리가 죄인이문 차라리 잡아다 가두라고, 당장 오늘이라도 갖다 가두문 소원이 없겄다고. 우리 야달 식구(아홉 식구에서 동수 한나 가불었응께) 안 죽고 살라고 풀칠할라고 고상고상 일하고 산디, 우리 가돠놓고 살리라고 몽그라댄께 감시를 조까 덜하더라고. 진즉 그리 못한 것이 애도랍디다.”
감시도 고통스러웠고 혜택도 싫었다. 모두 속을 후벼팠다.
“면에서 그때 10키로인가 쌀을 갖다줘. 어설피 그런 거 가져오지도 말라고 그랬어. 즈그 아부지가 비는 온디 쌀 한 포대를 쎄멘도 안한 흙마당에다 다 허쳐불었어. 고놈이 흙속에 다 배겨갖고 씰어도 씰어도 안 씰어지고. 속상한께 암것도 보내지말라고 그랬어. 난중에 명예장학금인가 나온 것도 내가 우리 아들 보내고 그 돈을 갖다가 살림을 하꺼이요 묵고살꺼이요. 돈 없어서 학교 공부 못한 사람 줘불었어. 그때 그 장학금 받은 완도 사람이 설 추석 닥치문 꼭 선물을 보내. 잊어불문 쓰겄는디 지금도 보내.”
“아픈 디는 없어. 근디 간장은 다 녹아불었제”
“우리 동수가 스물셋에 갔소 안. 살았으문 예순 다섯이제. 설이 되문 내 머릿속에선 나이가 한 살 한 살 채곡채곡 묵어지요.”
사진속 아들은 앳된 청년이다.
“이 동네에 우리 동수랑 동갑이 일고야달 될 것이여. 동갑쟁이들이 명절 때 오고 부모 생일 때 오고 그러문 항시 생각이 나제. 동수 생일 때도 생각나고. 음력 칠월 초이틀. 작은사우가 생일이 용케 한날이 되더라고. 긍께 더 생각이 나제.”
그해 오월로부터 마흔두 해.
“그 햇수를 산디 안 떠나고 안 잊아불어. 잠이나 자문 잊으까 눈만 뜨문 떠나도 안해. 우리 동네도 자식 먼저 보낸 어매들 있어. 아조 안 미쳐갖고 살기는 산디 실롱실롱 미치제. 낮에는 일하문 거그다 취미붙여서 간장이 덜 녹네. 밤이문 땅벌이 안한께 간장이 더 녹네. 앙겄다 섰다 천지만물이 다 생각나. 자는 동안 까빡 잊는 거 그거이 대복이여.”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남편은 세상 뜬 지 8년.
“머이든 동네사람들한테 베풀기 좋아한 양반이었제. 야든둘에 갔어. 동수 아부지도 그전에는 술 그러고 많이 안묵었어. 한잔이나 묵고 말제. 근디 동수 간 뒤로 맨나 술만 묵고 밥은 안묵고 무장무장 야우고 힘이 없었제. 나는 술 한모금 못하고 맨정신으로 살았어. 쪼까라도 잊어불게 그때 술을 배우꺼인디, 일내 술을 못 배우고 말아.”
오로지 일을 약으로 삼아 그 고통을 견뎠다. 작고 깡마른 몸집에 일로 살아온 긴긴 세월을 새긴 어머니는 “아픈 디는 없어. 근디 간장은 다 녹아불었제”라고 말한다.
이야기 도중에 아들 동채(62,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고문)씨한테 전화가 온다. 일이 있어 경기도 쪽에 가는 중이라는 아들한테 어매가 통화 끝에 당부한다.
“운전 조심해라. 늙은 사람은 암치게 살아도 돼. 젊은 사람이 무탈하고 건강해야제.”
“형님한테 누가 되지 않도록 살고, 형님 몫까지 내가 채워가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오월 활동을 지극정성으로 해오고 있는 동채씨는 세월호 참사 후엔 광주시민상주모임 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우리 동수가 그러코 갔어도 놈 본 연에는 내가 눈물바람 한나도 안해. 고통시로와서 밤이문 혼자 울지라도 놈들 앞에선 눈물을 일절 금했어. 놈들이 추하니 볼깜시로 짠하니 볼깜시로. 참을란께 더 힘들제. 사람 있는 디도 조까 피해야 허고. 눈물바람하문 자식들한테 해가 될깨비도 눈물바람 안하고 살아.”
오월이 오면 어머니는 망월동에 가고 조선대 교정에도 간다. 아들이 다녔던 서삼초등학교도 종종 찾는다.
“학교 가서 추모비 아래 풀을 뽑제. 댕개야제 어찌고 안 댕길 것이요. 어매가 돼갖고 자석한테 해줄 것이 풀 매주는 거배끼 없는디.”
추모비에 새겨진 아들의 말,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어머니는 “아이고…참…긍께…니가…그려갖고”라고 긴긴 말들은 속으로 삼킨다.
글 남신희 기자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이 글은 월간 전라도닷컴 5월호에도 수록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