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08]

“겨울 지나 젤로 몬야 핀 것이 요것이여.” 산수유꽃 노란 그늘 아래 양해순 어매.
“겨울 지나 젤로 몬야 핀 것이 요것이여.” 산수유꽃 노란 그늘 아래 양해순 어매.

<봄이 와도 아직은 다 봄이 아닌 날/ 지난 겨우내 안으로 안으로만 모아 둔 햇살/ 폭죽처럼 터뜨리며 피어난/ 노란 산수유 꽃>
(박남준 ‘산수유 꽃 나락’ 중)

뭉게뭉게 번지는 노란 빛, 노란 햇살. 봄은 그집 마당에 먼저 당도했다. 그집 마당의 산수유가 온 고샅을 밝히고 이 마을에 봄을 선언한다.

“겨울 지나 젤로 몬야 핀 것이 쟈여. 서리가 허옇게 와도 피고 눈와도 피고. 가을이 되문 또 열매가 바알그레 이삐고.”

양해순(85·곡성 오곡면 침곡마을) 어매한테는 정다운 호칭 ‘쟈’로 불리는 나무.

“쟈 나이가 솔찬하제. 나 열아홉에 심었어. 쟈도 나만치나 오래 살았구만. 아조 째깐한 나무였제.”

산수유 고장인 구례 산동면이 고향인 어매는 열일곱 살에 곡성으로 시집왔다. 봄이면 온통 노란 꽃대궐 이루던 고향의 봄이 그리워서 시집온 지 이태만에 신랑한테 부탁해서 산동에서 산수유나무를 얻어다 심었다.

“원래는 다섯 낭구 있었는디 인자 두 낭구 남았어. 옛날에는 산수(산수유)가 돈이 많이 되았제. 우리집 산수도 구례서 와서 열매째 따가고 그랬어. 시방은 따도 안하요. 언제는 광주서 온 사람이 오줌 싸싼 애기들 댈여믹인다고 폴라고 해서 그냥 따가라그랬소. 한 삼 년째 새가 와서 쪼사내래. 따묵을라고. 니그들이라도 묵어라, 나는 따도 못한다 그러요.”

어매 홀로 사는 집이다. 봄마다 산수유 노란꽃 같이 보던 영감님이 먼길 떠난 지도 몇몇 해.

뭉게뭉게 번지는 노란 빛, 노란 햇살. 봄은 어매네 집 마당에 먼저 당도했다.
뭉게뭉게 번지는 노란 빛, 노란 햇살. 봄은 어매네 집 마당에 먼저 당도했다.

“나는 친정에서 호강으로 컸는디 친정어매가 열다섯 살에 돌아가셨어. 올케 밑에서 산께 우리 아부지가 올케 조심함서 사는 만치 시어마니 조심하문 산다고 나를 일찍 여왔어. 시집 온께 땅은 쪼깨 있어도 가난한 집이여. 오만 일을 다 했제. 무선 시어마니 옆에 사니라고 애썼어. 시어마니를 친정어매 삼고 시어마니가 야단쳐도 돌아서문 웃고. 사람들이 나한테 치사를 했어. 토옹 얼굴이 찡그리들 않는다고.”

“웃음으로 이기고 왔어, 좋은 걸 보나 나쁜 걸 보나”라고 지난 세월을 말하는 어매.

“난중에는 시어마니가 내 심성이 곱다고 나한테 잘하시더라고. 다 우리 친정아부지가 갈쳐준 거여. 우리 아부지는 애기난 사람 미역 받아다주고 쌀 없는 사람 쌀 갖다 주고 생전 그러코 산 양반이여. 넘들한테 조깨라도 도움되게 살라고 항시 말하셨제.”

“너는 어디로 가서 이러코 못 오냐”

이렇게 작은 텃밭이라니! 뒤안의 장독대 옆 텃밭에도 봄이 왔다. “봄 오문 따땃한께 좋제. 풀도 없는디 무단히 앙거서 흙을 몬치고 있구만.”

부추 몇 포기 띄엄띄엄 푸릇푸릇. “부추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구만. 반갑제. 올라온께.”

“안 묵어도 볼라고” 키우는 부추다.

“보기만 해도 사랑시롭잖애. 모든 죽었던 작물이 다 살아나고 그런 것이 봄이제. 시상에는 사랑시론 것들이 많제. 첫째로는 자식이 사랑시롭고….”

말을 맺지 못하고 어매는 훅 울음을 내쏟는다.

“내 막둥이아들 보냈어. 하늘나라로.”

몇 해 됐다. “딸매니로 집에 오문 사방군디 다 치와주고 어매 보라고 꽃나무도 숭거주던” 아들이다.

“우리 막내, 아무리 잊아불라해도 못잊아불어. 봄이 와서 모든 것이 살아난께 작물은 죽었다도 다 살아난디 너는 어디로 가서 이러코 못 오냐, 그 맘만 들어. 몸뚱이가 안 아프문 저어 솔나무 있는디 밭에 가서 일이라도 함서 더 잊아불고 그럴 건디 가만히 방에 눴응께 더 생각이 나.”

텃밭 너머 고양이가 와서 어매를 보라꼬 앉는다. “기척이 나문 반가와. 나를 찾아온 것이 감사해서 밥을 차라줘.”
텃밭 너머 고양이가 와서 어매를 보라꼬 앉는다. “기척이 나문 반가와. 나를 찾아온 것이 감사해서 밥을 차라줘.”

그래서 텃밭에 나왔더니 푸릇푸릇 올라온 부추에 또 아들 생각.

“속을 안 뒤적거리문 병이 생개. 속을 자꼬 뒤적뒤적해서 좋은 생각으로 돌려야제. 보고 싶으문 노래도 불르고. 인자 금방도 눠서 혼자 불르고 나왔소. ‘…내 아들아 너 있는 곳 어디냐 너를 보낸 이 엄마는 잠 못들고 운단다’ 노래라도 불르문 속이 조깨 터져.”

“움섬도 밥 묵어야 허는 것이 인생”이라고 어매는 말한다.

“막둥이아들 장례식장에 가서도 내가 밥을 안 묵고 눈물바람하문 우리 새끼들 맘이 얼매나 아프까 싶어서 내가 맘을 독하게 묵고 안 넘어가는 밥을 묵었소. 자식들 걱정할깨비 눈물 안 빠치고 묵었제. 참았제. 자식들 본 디서 눈물 안 흘릴라고.”

“나를 찾아온 것이 감사해서 밥을 차라줘”

텃밭 너머 고양이가 와서 할매를 보라꼬 앉는다.

“고양이가 때가 되문 와서 밥 도라고 울어. 밥 말아서 줘. 빈내(비린내) 난 거 괴기가 있어야 묵제, 안 글문 안 묵어. 고양이 시중을 들어. 넘들은 뭘라 주냐그래도 때가 되문 와서 앵 앵 운디 배고픈 새끼 보는 거매니로 기냥 놔둘 수가 없어. 정지문 소리가 나문 와서 울어. 어매들 맘은 그래. 사람이든 즘생이든 배고픈 사정을 나 몰라라 못해.”

내 속에 든 눈물만치 깊어진 연민으로 내게로 온 것들을 따숩게 보듬는 어매.

“기척이 나문 반가와. 내 소리 듣고 니가 오냐 하고 반가와. 나를 찾아온 것이 감사해서 밥을 차라줘. 고맙제. 나를 의지하고 나를 찾아와서 울어싼께.”
산수유 노란꽃만 봄인 줄 알았더니, 그 마음이 봄.
글 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