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고창·서울의 고인돌…같은 듯 다른 풍경

화순 고인돌 감태바위채석장.
화순 고인돌 감태바위채석장.

   끝나버린 축제인데 그래도 여운이 남아 찾았던 축제들을 상기해 본다.

 10월 1일 오전 필자는 후배들과 함께 화순 고인돌 유적을 찾았다. 2000년 12월 강화도, 고창, 화순 이렇게 세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고인돌을 등재하였다. 그중에 화순은 단일 밀집 지역으로는 최대라고 하는 596기가 반경 3.4Km 외길 양옆에 있다. 게다가 산모롱이에는 채석장까지 함께 분포하고 있으니 거석문화의 베일이 한층 더 잘 드러나 보이는 곳이다. 거기에 인접한 도곡면 대곡리는 1971년에 청동유물이 발견되어 이곳 무덤군을 관할했던 제사장의 부장품일 것이라는 점까지 부각되는 측면이 강하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청동기 문화가 없고 모두 수입한 청동기라는 식으로 몰아붙이고 정립했었다. 그런 상황은 광복이후에도 일제 어용학자들에 의해 정설로 받아 들여왔고, 그 근거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근거지가 명확한 청동유물이 없다는 것에서 뒷받침했다. 하지만 화순 도곡면 대곡리의 청동기 유적은 그 장소가 분명하다는 것과 유물 자체가 단순한 껴묻거리를 넘어 당시 고도의 지배세력이 지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 받았다.

 1971년의 발견은 구재천이라는 주민이 돼지막 오물 배수로 작업 중 획득한 뜻밖의 성과라면 그 후 유물이 전라남도 문화공보과에 건네지면서 본격적인 발굴이 그 해말 진행되어 나머지를 수습하였다.

고창 고인돌 미디어아트.
고창 고인돌 미디어아트.

 한반도 청동기 시대 증언 확실한 장소

 이렇게 11점의 유물들은 1972년 3월 국보 제 143호로 등록되었는데, 이는 우리에게 부재했다는 청동기시대가 확실히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큼지막한 사건이었다.

 훗날 2008년 2월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그곳을 다시 정밀 발굴하며 청동검 2점을 추가 발굴했고, 무덤의 양식은 돌무지널무덤이라고 밝혀졌다. 그에 관한 얘기를 나는 광주드림 기사를 통해 세세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문화재청부터 잘못 언급된 부분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어서 딱 하나만 적고 싶다.

 엿장수에게 엿과 바꿔 먹은 것이 아니라 신고가 되어 이에 대해 문화재관리국에서 1972년 11월14일 입금했다는 국고입금확인서를 발급, 농협화순지소에서 30만 원을 받아라는 증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돈으로 어르신은 논 세마지기를 사셨다고 한다.

 어느 곳이나 그렇게 뒷얘기들을 재미있어하고 그 얘기는 마치 낚시꾼들이 놓친 고기가 20센티 짜리인데 하루 지날수록 1센티씩 커진다고 흉보는 것과 같은 이치 같다. 하여튼 팩트를 옮기거나 알아보려는 이들은 없고, 그 지어낸 말이 오히려 유적의 가치보다 더 크게 보여지는 것도 어찌보면 의도하지 않은 노이즈 마케팅 아니겠는가 자조해 보기도 한다.

 그렇게 소중한 고인돌유적군과 채석장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고창으로 향했다. 고창에서는 모양성제가 열리고 있다.

 고창의 벗은 면단위별로 강강수월래를 하니 일찍 오라고 하는데 그렇기는 어려워 그 프로그램은 포기하고 축제 공간만 좀 둘러보자고 했다.

 고창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모양성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사실 답성놀이에 있다. 한국의 발견 전라북도 고창군편을 보니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 위를 세바퀴 걸으면 자질구레한 병은 없어지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저승문이 열리는 윤사월의 초엿새와 스무엿새에는 근동의 수많은 여성들이 몰려와 성을 밟는다”라고 적혀있다.

 이 모습 또한 보지 못하고 복원된 관아와 부속건물과 조형물을 둘러보았다. 메인 무대의 행사가 멈춰있으니 방문자들은 저마다 산책을 하거나 체험 행사를 즐기고 있다.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한 모양성은 영광의 법성진성과 정읍의 입암산성과 함께 해안 방어의 전략기지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근동의 19개 군현의 관민들의 피땀으로 쌓아진 성이기에 성곽 앞에는 19개의 지역을 상징하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고, 개막식에는 각 고을의 수장들이 다 함께 모여 기념하는 행사도 치르고 있다고 한다.

고창 고인돌 바닥조명.
고창 고인돌 바닥조명.

 특정 장소가 갖는 터무니 분석 빈약

 축제 행사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왜적의 침입과 이를 방어하는 것을 재현하는 프로그램과 메타버스 공연인데 이 모두를 보지 못하고 향토음식 코너에서 고창이 자랑하는 복분자 쥬스 한잔 마시고 판매하는 것을 이리 저리 눈여겨 살폈다. 지갑을 열만한 자극적이거나 독특한 상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청보리밭의 유명세나 수박의 고장답게 이와 관련한 상품이 비교적 많아 괜찮았다.

 다시 걸음을 옮겨 죽림리의 고인돌 유적으로 갔다.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문화재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미디어아트 전시회를 개막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도 밀집한 고인돌이 250여기가 빽빽한 지역인지라 과연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함을 안고 배를 곯아가며 그곳에 도착했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진입 동선부터 불빛이 반짝인다. 사방은 어두운데 보행로를 마치 레드카펫을 걷는 것처럼 조명을 밝혔다. 그리고 터널형으로 공간을 만들어 천장과 벽이 별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구조물을 만들어 두었다.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것이 요즘의 트렌디한 세대들의 취향과 어울려 보였다. 다시 걷는 길, 사실 IT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가는 길인데, 정말 다양한 조명기구들이 발자국을 사뿐하게 만들고 있었다.

 주변으로 보여지는 조형물은 선사시대의 부족장 모습이 눈에 뜨였는데 그 뒤쪽의 달빛이 빛나니 제사장은 오히려 가려 보이기도 했다.

 특설무대에는 본 사업을 있게 해준 기관장 및 요인들의 인사말씀이 이어지다 태권도 군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영상으로만 보던 군무를 현장에서 보니 실감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영상에 길들여진 탓인지 아니면 아메리칸 갓 탈렌트의 태권도를 너무 봤는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꽉찬 객석 탓에 서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족히 500여명은 있는 듯 보이는 주무대를 떠나 영상 설치가 되어있는 고인돌 두 기를 찾아갔다.

 메인공간으로부터는 400여미터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바둑판식 고인돌에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무덤의 주인에게 드리는 헌정 영상 아닌가 라는 느낌이 드는 꽃과 몇가지 문양이 들어간 영상을 보며 저 영상의 기획의도를 읽지 못하는 내 상상의 한계 같은 것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돌아오며 못 보던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이달말까지 진행한다고 하니 다음에 소란스럽지 않은 날 오면 되겠다 싶은 마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축제가 갖는 의미는 오늘날에 많이 바뀌었을 터이다. 가장 주안점이 지역 마케팅과 브랜딩으로 의미가 옮겨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저 특정형의 장소가 갖는 터무니를 잘 연구하고 분석하고 다시 확장하는 그런 공감력이 내재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으로부터의 무게감 탓일 것이다.

암사동선사문화축제 설치미술과 조명.
암사동선사문화축제 설치미술과 조명.

 가장 첨단 미디어·가장 오랜 고인돌 `만남’

 근처에서 쌈밥으로 저녁을 먹고 친구네 집에서 1박을 하고 돌아왔다.

 가장 첨단의 미디어와 가장 오래된 고인돌의 만남은 아직 어색해 보였지만 그래도 저렇게 도전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음날 아침 갖게 되었다.

 10월 7일 서울의 강동구에서 선사문화축제를 개막하는 날이다. 1925년 한강 대홍수로 드러난 암사동 유적지를 광복후 여러차례 발굴하면서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대의 신석기 주거지로 밝혀진 곳이다. 주말이 다가오는지라 열차 표를 예매하는 것부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총알 클릭으로 SRT를 타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역시 서울은 사이즈가 달랐다. 한편으로는 어떤 판을 벌리면 이를 소비할만한 사람들이 인접해 있다는 사실. 그것이 지역과 다른 면모로 느껴졌다.

 진입 동선상에 바로 버드나무로 보이는 면류관형 길이 드러나고, 길에는 가을꽃들이 만개해 있다. 유적 공원 전체를 축제장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들어선 시간이 5시 무렵이라서 어두워지기 전에 한바퀴를 돌았다.

 주거지의 움집을 복원한 모습, 보존각을 두고 신석기와 청동기와 철기와 백제시대의 지표층을 경화처리해서 보여주는 것, 선사인이 수렵 어로를 했음을 상징하는 곳곳의 활동 조각물 등이 비교적 잘 배치되어 있었다.

암사동선사문화축제 체험장.
암사동선사문화축제 체험장.

 어둠이 내리자 본격적으로 축제를 시작한다.

 개막식은 조촐하게 관계자들만 모여서 서로 안부와 격려를 보내는 것으로 마감한다. 뭔가 좀 달라 보인다. 의전과 격식이 축제의 시작이라 여기는 우리 동네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요즘 정치인들은 대중들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이렇게 잘 아는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각각의 조형물에 불이 들어온다. 크레인에 메달린 달 모양의 구조물에도 불이 들어오니 진짜 달 보다 저 인공물이 달인 듯 눈에 들어온다. 내가 시골쥐라서 그런지 다시 눈을 씻고 보니 마찬가지다. 꼼꼼한 손길이 느껴지기 때문 같아진다.

 불빛으로 가득한 축제장을 도는데 두시간이 걸린다. 햇볕이 있을때는 한시간 걸리던 곳이 조명으로 두시간을 나를 붙든 것이다. (이어집니다.)

 전고필(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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