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이 만난 사람] 상무관 ‘검은비’ 정영창 작가
‘80년 5월 추모’ 복원 상무관에 검은비 존속 바라

정영창 작가.
정영창 작가.

 “50여 년 전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교실 환경정리를 시켰어요. 선생님의 지시에 교실을 열심히 꾸몄을 뿐인데 ‘너 참 잘한다, 미적 감각이 있으니 미대를 가도 괜찮겠다’라는 한 마디를 들은거예요. 그때 ‘내가 미술에 소질과 재능이 있구나!’라고 생각했고, 중학교에 입학한 후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미술을 시작한 계기는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부터였던 것이죠.”

 정영창 화백의 이야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80년대 초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시기, 군복무중이던 그는 비상대기조로 파견 대비를 하다 전역 후에야 참상을 접했다. 그렇게 그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을 가슴 한켠에 안고 살았다.

 민중미술은 어쩌면 숙명처럼 다가왔다. 관련 작업들을 보면서 독일이라는 나라의 민중미술이 궁금했다. “한국의 민중미술은 당시 상당히 선동적이고 미적으로 봤을 때는 거리감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예술이란 무엇인가, 현실 사회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등 근원적 질문에 사로잡혀 독일의 사실주의 판화가 ‘캐터 콜비츠’를 들여다봤다.

 예술에 대한 갈망 속 기대와 절망 사이에 놓인 정영창 작가는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80년대 중반이었다. 

채르노빌 소년, 2011. 캔버스에 아크릴과 래커.
채르노빌 소년, 2011. 캔버스에 아크릴과 래커.

 5월에 대한 부채의식 안고 독일로 

 독일 카셀대 미술대학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한 정 작가는 독일에서 부조리하고 슬프고 거짓된 사회를 현대적 방식과 기법으로 표현해내면서 신사실주의 작가로 주목받았다.

 그의 개인전은 일반작가들과 다르게 미술관과 성당, 문화원 등 공적 공간에서 모두 열릴 정도로 작품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뒤셀도르프 시립박물관, 예나시립미술관 피카소 미술관 등에서 9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졸업작품으로 뒤셀도르프 시립 박물관의 개인전 초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영국 사치 갤러리를 비롯해 뒤셀도르프 시립미술관, 뒤셀도르프 시립박물관, 뒤셀도르프 방공호 성당 등 공사립미술관들이 그의 작품을 주요 소장품 중 하나로 갖고 있다. 90년대에는 바젤 아트페어를 비롯해 아트페어를 석권하기도 했다.

 한국의 관객들과 만난 건 지난 1997년 서울 문예진흥원에서의 개인전이었다. 이후 2004년 부산 비엔날레 ‘틈’, 2014년 광주비엔날레 ‘달콤한 이슬 1980 그 후’로 인연이 이어졌다.

 독일에서 비극과 폭력의 현장에 주목하며 평화와 인권에 관한 작품 활동을 펼치던 그가 올해 유난히 무거운 걸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본보는 최근 정 작가와 만나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그의 소리를 청취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온 이유는 옛 전남도청 인근 상무관에 설치된 그의 작품 ‘검은비’ 때문이다.

 ‘검은비’는 가로 8.5m 세로 2.5m의 대형 추상작품으로 쌀에 유화물감을 섞어 쌀의 배열과 색감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쌀 낱알은 개개인의 생명을, 검은색으로 보이는 거대한 캔버스를 추모비를 상징한다.

 “검은비는 2018년 5·18 38주기를 맞아 상무관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추모 공간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에 중심을 두고 오월의 한을 풀어내기 위해 제작해 설치했다.” 

상무관에 설치된 정영창 작가의 작품 '검은비’.
상무관에 설치된 정영창 작가의 작품 '검은비’.

 18년 긴 시간 공들인 추모작품

 2000년 어느 날 창고에서 폭포처럼 햇빛에 반사되는 쌀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검은비는 연장선상의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이름도 존재도 없이 잊혀지고 산화해간 이들을 쌀 한 톨 한 톨에 담아냈다. 쌀 한 톨은 작은 우주이자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고로 ‘검은 쌀’로 덮여있는 표면은 모든 빛을 품고 있어 슬픔과 상처를 조용하고 따뜻하게 안아줘 모두의 빛이 되는 의미가 담겼다.

 정 작가는 “멀리서 보면 검은 단색의 추상회화와 같으나 가까이서 보면 입체감을 주는 작품으로 100kg가 넘는 쌀을 투입해 지난 2000년부터 18년에 거쳐 완성한 작품이다”고 말했다.

 긴 시간 공을 들인 ‘쌀’인 검은비 작품은 5·18 38주년 때 초청돼 독일 작업실에서 컨테이너에 실려 함부르크와 부산을 거쳐 광주 상무관에 도착해 자리 잡게 됐다.

 이름도 존재도 없이 잊혀지고 사라진 수많은 이들을 기리는 의미를 상무대라는 역사적 공간에 배치하면서 더욱 선명한 색깔을 갖게 된 것.

 그러나 최근 옛 전남도청 원형 복원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달이 났다.

 광주광역시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측이 해당 작품 철거를 요청한 것, 2년 전 논란이 재현되면서 그의 고민도 깊어져 간다.

 정 작가는 “그동안 추모비 역할을 해온 작품으로, 5월의 자산과 상징물로 자리매김한 만큼 함부로 철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2018년 당시 5·18행사위와 함께 작품을 설치하면서 오월어머니들을 모시고 추모굿까지 연 이상, 더 이상 작가의 작품이 아닌 5월 영령들의 비가 됐고 광주에 작품을 헌정한 것”이라면서 “검은 비는 추모객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5월의 자산과 상징물이 됐기 때문에 함부로 철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옛 전남도청이 원형 복원 공사에 들어가면 검은 비 철거 논란이 재현된 것으로, 상무관은 1980년 5월 당시를 재현하는 공간으로 바뀔 계획이다. 재현이라 함은 시신과 관 등이 놓여 있는, 1980년 당시 찍힌 사진을 토대로 꾸미겠다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정 작가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이 또한 ‘반대’”라고 분명한 목소리를 낸다.

 “당시 그분들의 상처를 드러내 아팠고, 아팠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겠지만, 다른 시민들 입장에서 보면 한번 상무관을 다녀오면 두 번 다시는 안갈 것 같다. 시각의 차이겠지만 재현은 아니라고 본다.”

 이는 검은비의 존치 여부를 떠나 복원 방향성에 대한 문제 제기다. 

5·18 사적지인 광주 동구 상무관에 전시된 예술작품 '검은 비' 앞에서 한 학생이 추모하고 있는 모습.
5·18 사적지인 광주 동구 상무관에 전시된 예술작품 '검은 비' 앞에서 한 학생이 추모하고 있는 모습.

 “상무관, 채우기보다 비워야 의미 있는 공간”

 “상무관이라는 공간을 처음 봤을 때, 주검이 안치돼 있고 나무에 가려져 숨겨져 있는 모습이 하나의 커다란 관처럼 보였다. 내부에 들어가 보니 텅 비어있지만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영혼들이 아직도 떠나지 못한 채 머물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생생한 상무관 첫 대면 소감이다. 그렇게 떠나지 못한 영혼을 달래서 시민들과 조우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정 작가는 “상무관이 어떤 작품이 들어가서 중요한 게 아니라 상무관 자체가 하나의 추모공간으로서 역할하는 게 중요하다. 추모공간에 알맞는 추모비나 형성물이 들어가야 한다”면서 “검은비로 인해서 상무관이 추모관이 되고, 시민에게 365일 개방되어 열려있는 추모공간이 된다면 광주는 대단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5·18 기록관이나 전일빌딩처럼 모든 콘텐츠가 가득 차 있는 것과 달리 상무관은 텅 비어있어서 생각할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해석이다. “텅 빙어 있는 공간이 주는 선물”이라는 게 작가의 표현이다.

 “독일이나 유럽 사회에서는 중요한 일을 시민들이 직접 결정할 수 있게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개입하지 않고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 사안을 전달한다”는 정 작가는 “광주가 조금 더 열려있는 도시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아픈 우리의 역사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됐을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교훈 삼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생각에다 늘 ‘5월’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작업하고 있다”면서 “10월 말 다시 독일로 출국한다. 그 이전 검은비가 상무관에 남아있는 방향으로 결정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유새봄 기자 newbo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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