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한없는 부끄러움을 준 금곡동 삼괴정(三愧亭)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부끄러움의 미학-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던 시대에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옛 사람들은 염치가 인간과 축생간 차이로 봤다. 예(禮) 의(義) 염(廉) 치(恥),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나라를 지탱하는 4가지 도덕적 기둥 가운데 하나기도 했다.
맹자도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따르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겸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한다. 수오지심이 바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의롭지 않으면 마땅히 부끄러운 마음이 생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의롭지 않은 것이다. 개 돼지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매천 황현에게 독배를 마시게 한 것도 부끄러움이었다.
광주 북구 금곡동에는 삼괴정(三愧亭)이 있다. 금곡동 입구 삼거리 길에서 소쇄원으로가는 도로 옆 하천변 윗골 꾀꼬리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 정자가 있다. 미립(未立·학문을 이뤄 뜻을 세우지 못함), 미현친(未縣親·아버지의 명예를 높이지 못함), 미교자(未敎子·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함) 등 `세 가지가 부끄럽다’며 무등산 기슭에 숨어살던 구 한말 선비, 문유식이 있었다. 삼괴정은 삼괴 문유식의 뜻을 기려 아버지가 놀던 곳에 아들 문병일이 지은 것이다. 겸손하고 자책하는 마음을 정자에 담아 후손들에게 좋은 교훈적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인적끊기고 입구는 용접으로 봉쇄…
정자의 현판은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 1874~1965)가 썼다. 송운회는 보성 출신으로 독특한 설주체를 완성했으며 “설주(雪舟)의 먹물에 보성강이 검게 물들어 아낙네들이 빨래할 수 없었다”는 전설과 함께 마지막 일심(一心)이란 두 자를 남기고 92세인 1965년 임종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서예의 거봉이다.
지척에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취가정, 풍암정 등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누정들이 즐비해서 그런 지 이런 탁월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삼괴정은 찾는 이들이 거의 없다.
삼괴정에서 원효사 계곡에 있는 풍암정은 1.9 Km 떨어져 있고 환벽당과는 2.4 Km 떨어져 있다.
말로는 무한 책임감을 떠들면서도 전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높은 사람들 얼굴로 텔레비전 화면이 어지럽던 요즈음, 사람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을 몹시도 부끄러워했던 구 한말의 선비, 삼괴 문유식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정자가 빤히 건너다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운다. 정자를 찾아다니는 길이 고행길인 것은 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마는 가보니 세상에나! 길이 없다. 시뻘건 칠을 해 더욱 흉물스런 쇠다리는 아예 입구 문을 용접해 버렸다.
자꾸 발목을 잡는 마른 풀밭을 헤치고 돌고 돌아 도착한 그 길은 소요유의 산책길이 아니었다. 차라리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고난의 행군길에 훨씬 더 가까웠다. 돌격 앞으로!
허걱! 우선 내 눈을 의심했다. 이럴 수가? 도착해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산이 나를 에워싸고 그믐달 처럼 살라고 한다.”(박목월) 금곡동 삼괴정은 ‘산이 나를 에워싸고’가 아니라 ‘비닐하우스가 날 에워싸고’의 정자였다. 무등산이 에워싸고 있는 정자인데 흉물스런 비닐 하우스가 에워 싸고 있는 것이었다. 비닐 하우스가 정자 주변을 에워싸는 것도 모자라 아예 비닐로 정자 몸체까지 감싸고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동네 정자도 이렇게는 안할 것 같다.
거기다가 마구 버려진 쓰레기들과 농자재, 찢어진 폐비닐 조각들이 범벅이 돼 있었다.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조폭 보스 강 사장은 부하 선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문화재에 대한 모욕·폭력
이 정자에 영혼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주먹질만 폭력이 아니다. 이건 문화나 문화재에 대한 모욕이자 폭력이다.
이러고도 문화 수도니 예향이니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소중한 문화 유산 관리를 이렇게 하다니!
오늘 삼괴정에서 내가 느낀 것은 분명 부끄러움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이었다.
이상한 부끄러움을 안고 돌아서는 삼괴정에는 봄꽃보다 더 붉은(霜葉紅於二月花) 마지막 단풍이 소리 없이 지고 있었다.
소한재 (시민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