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새로운 눈
일 년의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알리는 크리스마스다. 올해의 광주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환상을 지켜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쉬지도 않고 펑펑 눈을 뿌려주었다. 40cm에 육박하는 적설량에 세상이 하얗게 덮이고, 사람들은 거리를 누비거나 차를 타고 이동하기 굉장히 불편해졌다. 항공편은 결항했고, 선박 운항도 통제됐으며, 도로 통행이 통제되어야 할 만큼 사고도 잦았다. 집 앞 골목만을 쓸고 닦는 데에도 꽤나 많은 공력이 들었는데, 몇 년간 광주에서 살며 이 정도의 눈은 상상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던지라 영 아연했다.
이번 폭설은 한반도 남서쪽을 죄다 덮쳤다. 이상한 일이지만 완벽한 설명이 있었다. 북극에서 찬 공기가 내려와 서해에서 눈이 되어 잔뜩 쏟아부어 졌다는 것이다.
북극의 찬 공기는 기후변화로 인해 있어야 할 곳에서 한참을 내려왔고, 서해 역시 기후변화로 인해 평소보다 온도가 높았다. 찬 공기와 따뜻한 바다 표면이 만났으니 끝없이 눈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 끝도 없이 새벽 깊도록 눈이 내릴 때 신기함을 넘어 무서워졌었는데, 언제나처럼 이것이 그 이유인 듯했다. 기후변화. 그리고는 조금은 슬퍼졌다. 작은 것에 기뻐할 수 없도록 나날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극단의 상황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즈라 잭 키츠의 <눈 오는 날>(1995, 비룡소)을 읽을 때도 창밖에선 계속 눈이 내렸다. 책 속에서는 눈 내린 세상이 놀랍고 새로워 행복한 주인공이 웃고 있었는데, 나는 눈을 보며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피터-우리의 어린 주인공은 새빨간 옷을 입고 새하얀, 그러나 파스텔 색조의 갖가지 색이 섞인 눈밭 위를 걷는다. 발자국을 남기기도, 막대를 찾아 줄을 긋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그리는 환상처럼 풀썩 드러누워 천사 모양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색들이 지면에 가득해서 눈이 다만 흰색을 띠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바람에 가슴이 두근거린 피터는 눈을 꼭꼭 뭉쳐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나 집안은 너무 따뜻했고, 눈은 전부 녹아버리고 말았다. 피터는 슬픈 마음을 안고 침대에 들어간다.
그날 밤, 피터는 해님이 눈을 몽땅 녹여 버리는
꿈을 꾸었어요.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 보니, 꿈과는 달랐어요.
온 세상이 여전히 하얗거든요!
또다시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어요.
<눈 오는 날> 중에서.
피터는 그 환상적인 풍경을 사랑했다. 당연한 일이다. 눈 쌓인 세상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피터는 걷기도 하고, 놀아도 본다. 너무 쉽게 녹아버려 속상하지만, 다음 날 일어나도 눈은 그대로다. 한 해가 지난 다음번 겨울에도 피터는 눈을 반가워할 것이다. 그에게 `눈’이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을 처음 본 아이는 그것이 내일도 여전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눈’은 과연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까?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앞으로도 지켜나갈 수 있을까?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이제 세상에 없다 보아도 좋다. 많은 것들이 빤해졌고,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이것저것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이다. 경험은 아주 귀한 것보다 꽤 건조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런 것들에 놀라고 새로운 면모를 찾지 않으면, 살아가는 데에는 재미나 활력이 반쯤 줄어든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만한 이야기다.
이제는 눈 오는 날을 즐기기 위한 조건이 더는 단순하지 않다. 피터처럼 문밖으로 나서 바닥에 발자국을 만들며 마음 편히 놀 수 없다. 기후변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것을 바꿀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야 하고, 행동하든가, 행동하지 않든가, 스트레스를 받든가, 이 모두를 전부 동시에 하든가… 아무튼 참 복잡하다.
피터의 눈과 우리의 눈은 이제 더이상 같지 않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놀라기만 해도 괜찮았던 때에서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새로운 눈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말할까. 새하얀 눈보라가 광주를 뒤덮은 날, 피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지 묻는다.
문의 062-954-9420
호수 (동네책방 ‘숨’ 책방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