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 광주의 누각들
광주목 승격 기쁨 담은 희경루

`어번폴리’가 현대적 도시 경관의 방법이라면 누정은 조선시대의 마을 이미지를 결정했다. 어번폴리 중 한 곳인 광주 도심의 금남공원.
`어번폴리’가 현대적 도시 경관의 방법이라면 누정은 조선시대의 마을 이미지를 결정했다. 어번폴리 중 한 곳인 광주 도심의 금남공원.

 요즘은 도시경관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덕분에 도시경관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많다. 또한 새로운 조형물뿐 아니라 지금은 사라졌지만 고색창연했던 옛 건물들의 존재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광주에도 예전엔 눈길을 끌만한 큰 건물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광주에는 몇 개의 누각, 즉 사방을 굽어볼 수 있게 만든 다락집들이 있었다. 그 하나가 황화루(皇華樓)였다. 이 누각은 정면 3칸에 옆면이 2칸이었고, 2층은 난간을 두른 다락으로 되어 있었다.

 황화루는 광주를 찾는 귀빈들을 접대할 목적으로 세워진 객사의 정문이기도 했다. 황화라는 이름도 ‘시경’의 ‘황황자화(皇皇者華)’란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이 노래는 사신을 떠나보내는 군주의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고 하는데 의미가 확장돼 지체 높은 손님들이 들고날 때 하는 연회나 의식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누각의 위치는 어림짐작할 수 있다. 객사의 본건물이 지금의 무등시네마 자리에 있었고, 객사 부지의 남쪽 끝자락이 옛 전남도청에서 광주천의 서석교를 잇는 길(서석로)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아 객사 정문인 황화루는 서석로와 거의 맞닿은 선에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옛 경찰병원 자리가 황화루 터였지 않나 싶기도 하다.

 황화루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영조 때 나온 ‘여지도서’엔 김시영이 광주목사로 있던 계유년, 즉 1753년에 지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처음 지었다는 뜻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광주읍지’엔 김시영이 황화루를 중수, 즉 낡고 헐은 것을 손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간수양성소 사용되다 70년대 헐려

 한편, 광주에서 조선시대 건물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진 것에 비하면 황화루는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다만, 1910년대 지금의 동명동에 형무소가 생길 때 이 누각을 뜯어다가 그 정문 쪽에 세우는 바람에 그 본래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광주 출신의 언론인 최창학 선생의 글을 보면, 일제강점기였던 어린 시절에 형무소 앞쪽에 서있던 이 누각에 올랐다는 회고담이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동명동으로 옮겨간 황화루는 형무소 정문으로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일제가 발간한 자료를 보면, 황화루는 형무소 정문의 바른쪽에 있었고 그 용도는 간수 양성소였다고 한다. 또한 간수 양성소라는 용도에 맞춰 그 형태도 바뀌었는데, 본래 기둥만 남기고 사방이 툭 터져 있던 모습은 사방을 벽으로 둘러친 형태로 바뀌었다. 그나마 이렇게 바뀐 건물도 1970년대 교도소가 문화동으로 이전될 때 헐렸다고 한다.

 또 다른 누각으로는 희경루(喜慶樓)가 있었다. 이 누각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일 신숙주의 ‘희경루기’란 글을 읽다보면, 누각은 본래 충장로5가의 공북루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묘사돼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문헌들을 보면, 희경루의 자리에 관덕정이란 건물이 들어섰다고 했다. 관덕정은 지금의 광주우체국 근처에 있었으므로 그 위치는 우다방 일대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본래 충장로5가에 있던 것을 훗날 중수를 하면서 충장로2가쪽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황화루와 달리 희경루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누각의 이름, 희경은 1451년 광주가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 승격된 것을 경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때 고을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 경축했다(父老咸集致慶)했다고 하는데, 희경이란 두 글자는 여기서 비롯됐다고 신숙주는 적고 있다.

 그러나 심언광의 또다른 `희경루기’에는 이 때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서로 경축해마지 않았다는 ‘읍인함희상경(邑人咸喜相慶)’이란 자구에서 희경이란 이름이 나왔다고 하며 그 유래를 조금 달리 해석하기도 했다.

 1533년 화재로 소실…여러차례 중수

 그런데 기쁨의 누각이란 이름과 달리 희경루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희경루가 20여년 만에 광주가 군에서 목으로 승격된 일을 축하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지만, 이런 뜻이 무색하게 1489년 광주목은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된다. 지금의 부시장쯤에 해당하는 판관이 야심한 시간에 누군가 쏜 화살에 부상을 입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나고 10여 년이 흐른 1501년에야 광주는 다시 목으로 복구됐다.

 허나 이런 기쁨도 잠시. 심언광의 `희경루기’에 따르면, 이런 광주의 부침을 지켜봐온 희경루는 1533년에 화재로 깡그리 불탔다. 다행히 수개월만에 가까스로 재건하기에 이르렀다는데, 이 일은 당시 목사인 신한이란 사람의 공이 컸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신한이 희경루를 서둘러 재건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화재 당시 현직 목사였기 때문에 그 뒷수습도 해야 할 처지였다. 또 개인적으로 희경루가 처음 세워진 과정을 기록한 글 `희경루기’의 저자인 신숙주의 후손이기도 했다.

 어떻든 이 때 재건된 희경루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희경루방회도’다. 이 그림은 1560년대 광주목사 최응룡이 자신의 과거시험 동기생들과 이곳에 모여 연회를 개최하면서 남긴 것인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2007년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한편, 희경루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는데 17세기까지는 이런 중수를 통해 온전히 보존됐던 것 같다. 그러나 1680년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희경루의 중수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로부터 70여년 뒤부터는 희경루 대신에 관덕정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런 희경루만큼 사연을 가진 누각들은 또 있었다. 지면 관계상 다른 누각은 다음 시간에 다뤄야 할 것 같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1년 11월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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