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이 만난 사람]
‘붐붐 아저씨’ 김창규 전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
“그 시절 야구장, 군사 정권 한 풀어주던 ‘잔칫집’”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 시절을 회고하는 김창규 씨. 자신이 운영하는 막창집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 시절을 회고하는 김창규 씨. 자신이 운영하는 막창집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연말연시, 새해를 앞두고 지인들과 술 한 잔 기울일 일이 많아지는 때. 북구 문흥동의 한 음식점에서 김창규 전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을 만났다.

 김창규 전 응원단장는 자신을 ‘막창집 사장님’ 대신 ‘전 응원단장’으로 소개할 정도로 ‘타이거즈’에 대한 자부심을 자랑했다.

 또한 가족 같았던 무등 야구장의 분위기와 선수들과 관중들의 정, 이제는 느낄 수 없는 그 시절의 향수를 추억했다.

 먼저 김창규 씨는 “전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이면서 지금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고, 야구 경기라면 무조건 좋아하고 지금도 변함없이 ‘타이거즈’라는 상호만 보거나 들어도 벅차오르는 김창규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응원단장이 된 계기를 묻자 “고등학생 시절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 다니며 자연히 야구를 접했고, 소풍 때나 야구부 경기 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응원을 하는 게 즐거워 자연스럽게 응원단장을 맡아서 응원을 하게 됐다”며 “1982년 광주에 프로야구가 생겨서 고등학교 야구보다 더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다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발적으로 응원을 했고, 관중들이 남녀노소 다 있다 보니 고등학교 때 하던 방식을 적용할 수가 없어서 처음엔 온 경기장을 돌아다니면서 응원을 했다”고 밝혔다.

1984년, 해태 타이거즈 홈경기에서 시구하는 김창규 씨. 당시에는 비공식 응원단장이었다. 김창규 씨 제공.

 80년대 관중들 모두 앉길래 스스로 응원 무대 올라

 1983년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단장을 자처한 것인데 그 시절에는 “3루에서 하다가 외야도 가고, 1루도 가고 야구장의 모든 관중들을 직접 마주치고 응원하니까 사람들이 더 흥미로워하고 좋아했던 것 같다”며 “기아 야구를 보려면 3루로 가야 된다는 것이 그때 생기지 않았나 싶다. 제약회사 세일즈맨으로 근무하던 때인데 퇴근하고 야구장에 가서 사람들 흥을 돋워주고 또 우리 호남의 한 맺힌 감정을 구수한 말로 풀어주고 하다 보니까 사람들도 색다르다며 즐거워해준 것 같다”고 회상했다.

 구수한 말솜씨뿐만 아니라 야구장 분위기를 끌어올렸던 1·2·3 박자 박수, 2·3 박자 박수 역시 80년대 그가 직접 만든 응원법이다. 현재도 여러 구단에서 사용 중인 ‘짝짝 짝짝짝 OOO 안타’ 구호 역시 비공식 응원단장 시절 만들어졌다.

 이 시절에 대해 “응원 구호도 하고 해야 하는데 시끄럽다고 마이크나 확성기 같은 거는 아예 쓰지를 못하게 해서 호루라기랑 목소리로만 하니 광주에서 여섯 경기를 연거푸 하면 목이 다 쉬어버렸다”며 “관중석을 돌다 보면 타잔 소리 내는 사람도 있었고, 해태 아줌마도 있었다. 해태 아줌마는 한복 입고 부채춤도 추고, 전라도 사투리로 농담도 하고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했다. 껌도 막 뒤로 돌아서 던져주고, 누가 껌 받아 갔는지 다 기억해서 찾아가서 돈 받고 했었다”며 추억했다.

 또 “3루에서 다 같이 서서 응원을 하면 외야나 1루에서도 응원을 갈망하는 눈빛이나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래서 단합된 모습을 한 번 보여주자고 해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파도타기를 돌렸다”며 “지정석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나 건달들 이런 힘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안 일어났다. 그래서 그쪽을 가리키면서 ‘그러지 말고 하자 하자’ 얘기하면 손뼉 치면서 같이 해주니, 파도를 세 번 네 번도 돌리고 했다”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등 야구장 1루에는 임갑교 초대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이 자리하기도 했다. 당시 해태제과에서 근무하던 임 단장은 파견 형식으로 임직원 응원단을 이끌었고, 색소폰으로 ‘목포의 눈물’을 연주하고 관중들은 이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적 노래로 자리 잡기도 했다.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 경기에서 응원전을 펼치는 김창규 응원단장. 김창규 씨 제공.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 경기에서 응원전을 펼치는 김창규 응원단장. 김창규 씨 제공.

 “공식 단장아니어도 관중들이 목마 태우고 난리…”

 김 씨는 “그때는 관중들을 유도하는 응원단장이 없던 시절인데 자발적으로 응원을 했고, 구단에서 정식 응원단장을 제의도 해줬다”며 “제약 회사 보수가 워낙 많던 시절이라 그냥 취미로 관중들의 흥을 돋우는 응원을 하겠다고 답했다. 갑교 형이 이때 정식으로 관중들도 응원을 유도하게 됐다. 갑교 형이 들어온 이후에는 3루랑 외야에서만 흥을 돋워주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약회사를 다니다가 88년도에 부산의 신발 공장으로 옮겨서 노사 분규를 해결하고 대화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었는데 보수가 적다 보니 3년 만에 광주에 돌아왔다”며 “부산에서 일할 때도 야구를 잊지 못해 그 당시 김해와 광주를 하루 세 차례 다니던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응원하고, 경기가 끝나면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고 부연했다.

 또 “광주로 돌아와서는 친형 가게에서 식당 일을 배우기 위해 5년간 일을 하면서도 야구 응원을 못 끊었다”며 “식당이 쉬는 날에는 당연히 야구장을 갔고, 일하는 날에도 일찍 나와서 야구장을 갔다. 친형이다 보니 응원하러 간다고 하면 보내주고 그랬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특히 “서울 원정 응원을 많이 갔는데 그 당시 서울은 사실상 원정이 아니었다. 특히 전라도 사람들이 좀 드세고 하니까 상대 팀은 꼼짝 마라였다”며 “경기가 아니라 응원에서 져도 완전 난리가 났었고, 공식 응원단장이 아니었어도 가서 응원 한 번 하면 사람들이 목마 태우고 잠실벌을 돌아다니고 아주 대접받은 기억이 난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는 군사 정권의 한이 워낙 컸다 보니 그렇게라도 한풀이를 해주니 좋다고 했던 것 같다”며 뿌듯해했다.

 하지만 응원 열정 속에 아픔도 있었다. 김 씨는 “1988년 5월 31일에는 롯데와의 경기 때 사직 야구장에서 응원을 했다”며 “그 당시에 4-1로 이기다가 8회말에만 7점을 줘서 4-8로 지고 있었던걸 9회초에 9-8로 다시 역전시켜버리니 난리가 났다”라고 언급했다.

 당시 “특히 부산은 전라도 출신인 사람이 많다 보니 모여서 박수도 치고 했는데, 막판에 뒤집어서 이겨버리니 난리가 났다”며 “깡통도 날아오고 술병도 날아오고 하니 왜 던지냐고 싸우고 아주 큰일이었다. 당시에 관중들도 많이 다치고 쇼크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1996년,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 현대 유니콘스의 한국시리즈 경기에서 응원전을 펼치는 김창규 응원단장. 김창규 씨 제공.
1996년,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 현대 유니콘스의 한국시리즈 경기에서 응원전을 펼치는 김창규 응원단장. 김창규 씨 제공.

 13년 비공식 단장 하다 1996년 공식 응원단장

 김 씨는 1996년, 다시 한번 해태 구단의 제의를 받고 결국 정식 응원단장의 길로 들어선다. 이에 대해 “13년을 비공식 응원단장을 한 와중에 1996년 다시 제의를 받았다”며 “갑교 형이 1994년을 끝으로 그만뒀고, 1995년 한 해 동안 젊은 친구가 맡았는데 전라북도 출신이라 전라남도하고는 잘 안 맞고 하다 보니 구단에서 다시 제의를 준 것 같다”고 언급했다.

 이에 “구단에 조건을 제시해야 하는데 가정이 있으니 원정은 갈 수 없어 광주에서만 하고 대신 서울 큰 경기는 내가 돈을 안 받고라도 가겠다고 했다”며 “당시에는 132경기(정규시즌 126경기, 한국시리즈 6경기) 중 66경기 정도를 보수를 받고 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식 응원단장이 된 후에는 “그때는 무등 야구장 전체가 해태 팬으로 가득 차서 다른 팀 응원은 할 수가 없었다. 경기를 하면 그날은 근처 중국집이 전부 술이 떨어질 정도였다”며 “1루에서 처음 시작해서 외야를 거쳐서 9회에는 3루에서 대미를 장식하도록 했는데 외야나 1루, 3루 구석에는 단상이 따로 없어서 그냥 난간에 올라갔다. 난간에 걸려서 옷도 찢어지고 단추도 떨어지고, 바지도 찢어지고 했는데 꼬맬 수 없을 정도여서 아내가 바지 같은 경우는 일주일에 두세벌씩 사왔다”고 설명했다.

 또 “삼삼칠 박수나 기차 박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응원을 창조했는데 그게 ‘우우’하고 외치는 거였다”며 “사람들이 맨날 앉아만 있으니 지쳐있는데 ‘일어서’ 그러면 선 사람도 있고 앉은 사람도 있고 질서 정연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앉혀서 ‘일어서’ 하면서 사람들이 일어나는 걸 보고 ‘우우’하고 외쳤다”고 회상했다.

 특히 “당시 해태에 ‘봉봉’이라는 음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우우’하는 소리를 멀리서 듣고 ‘봉봉’으로 착각했다. 그게 ‘붕붕’으로 가고 ‘붐붐’으로까지 바뀌면서 ‘붐붐 아저씨’라는 별명이 생긴 것 같다”며 “‘우우’하고 외쳤던 것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로 선수들 사기도 북돋아 주고, 응원을 하면서 지친 내 마음도 풀어주는 의미였다”고 별명의 출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무등야구장 외야 난간에 올라 응원을 유도하는 김창규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 김창규 씨 제공.
무등야구장 외야 난간에 올라 응원을 유도하는 김창규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 김창규 씨 제공.

 ‘우우’, ‘봉봉’… ‘붐붐 아저씨’로

 또한 “선수들 사기 진작을 위해서 애들 이름까지도 불러줬다. 성곤이 아빠 잘 해라 하니까 순철이가 돌아보고 엄지도 날려주고 성한이 아들 범진이, 범수, 정환이 형 아들 경식이, 인호 딸 청아 이렇게 다 외쳐줬다”면서 “김응용 감독님이 ‘왜 애들 이름을 얘기해서 주눅 들게 만드냐’고 싫어하셨는데 (김)성한이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느끼게 되더라. 가정도 있고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니 좋다’고 하니까 김 감독님도 하라고 해주셨다”고 말했다.

 더불어 “라인업도 꼭 한 번씩 불러줬다. 선수들 이름 부르고 ‘좋냐?’고 물으면 관중들이 ‘좋다!’라고 따라 했다”며 “지금은 상대 팀을 존중한다고 공격할 때만 응원하는데 그때는 수비할 때 조용하니까 그렇게 응원했다. 투수부터 타자들까지 모두 소개하면서 ‘좋냐? 좋다!’를 반복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리랑 목동’과 ‘남행열차’, ‘잘 있어요’도 많이 불러서 김수희 씨나 이현 씨가 ‘이 노래를 불러준 덕분에 내가 컸다’며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고, ‘목포의 눈물’은 우리한테 애국가나 마찬가지였다”며 “목포의 눈물은 안기부에서 부르지 말라고도 많이 했다. 안기부에서 근무하는 형님도 ‘위에서 안 좋게 보니 조심했으면 좋겠다’고 걱정을 많이 해줬는데, 관중들이 더 신나서 부르니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목포의 눈물을 부르면서 꼭 김대중을 외치니 더 난감했을 것이다”라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해태 팬들의 뜨거운 열정이 때로는 엇나갈 때도 있었다. 김 씨는 “경상도 차가 야구장에 오면 보닛이나 지붕 위에 올라가서 밟아서 찌그러트리고 했다. 대구에 가서 해태 버스가 한 번 불타니 경북 번호판을 달고 오면 대갚음해 준다는 것”이라며 “내가 가서 ‘내려와라, 경상도로 떠난 사람이 얼마나 야구가 보고 싶었으면 그 번호판을 달고 여기까지 운전해서 왔겠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같이 만류했다”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지고 있으면 술병도 던지고, 얼음물이나 쓰레기통도 던지고 별게 다 날아들었다. 가장 앞에 서있으니 그걸 맞아서 안경도 깨지고 피도 나고 했다”며 “그런 봉변을 당해도 ‘이긴다, 뒤집는다’는 생각을 갖고 더 흥겹게 응원했다. ‘응원 안 하면 계속 진다, 이길 수 있게끔 힘 실어주자’고 말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 맞다. 하지 마라. 당신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다 같이 응원하고 했다”며 의연함을 보였다.

 이러한 열정이 선수들에게 전달된 것인지 해태 타이거즈는 김 씨가 정식 응원단장이 되자마자 2년 연속 왕좌에 올랐다. 이에 대해 “응원단장을 맡아서 우승이라는 영예를 누리는 게 힘든 일이다. 선수도 입단해서 우승하기가 힘든데 그걸 두 번이나 했으니 남다르다”며 “항상 경기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자기 전에 면도를 했다. 경기장에도 딱 오후 5시에 갔다. 괜히 나도 같이 징크스를 만들고, 긴장도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또한 “1996년, 1997년에는 1만 5500석 표를 다 팔고도 야구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밖에 줄을 서 있었다. 이미 표가 매진됐으니 입구를 지키던 대학교 후배들한테 얘기를 해서 문을 열어주고 계단까지도 꽉 채웠다”며 “그렇게 입장한 사람들은 미안하니 먹을거리를 많이 사 왔다. 계단에 앉아서 표 사서 들어온 사람들한테 음식도 나눠주고, 정말 양보심도 있고 질서가 있었다”고 추억했다.

2001년 7월 29일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홈경기 후 무등 야구장 내야에 올라 마지막 응원전을 펼치는 김창규 응원단장. 김창규 씨 제공.
2001년 7월 29일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홈경기 후 무등 야구장 내야에 올라 마지막 응원전을 펼치는 김창규 응원단장. 김창규 씨 제공.

 “근성이 있어야 강한 팀 된다”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는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인해 1998년부터 내리막을 걸었다. 2001년 8월에는 구단을 기아자동차에 매각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 씨 역시 이 과정에서 응원단장 직을 내려놨다.

 이에 대해 “2년 연속 우승을 하고 1998년부터는 선수를 다 팔아버렸고, 꼴찌는 안 했지만 성적이 내려가니 관중이 없어 심심해져 버렸다. 항상 만원 관중이었는데 2~3000명 밖에 안 올 정도였다”면서 “해태가 넘어갈 때 기아에서는 응원단장을 더 해달라고 했는데 조건이 달랐다. 2002년도니까 정규 시즌만 133경기를 했는데 원정 경기까지 다 해주길 바랐다”고 밝혔다.

 이어 “돈을 그만큼 준다고는 했지만 나이가 있어 체력도 안됐고 가정을 위해서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애가 셋이었고 늦둥이 딸이 네 살이었다”며 “이미 1995년부터 지산동에서 ‘해태촌’이라는 식당을 하고 있어 이 일을 이어가기로 했다”고 부연했다.

 김 씨가 응원단장 직을 내려놓은 후 세월이 흐른 만큼 응원 문화도 변했고, 무등 야구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라는 좋은 시설도 갖추게 됐는데 “새 야구장을 짓고 두 번을 가봤는데 한 번은 지인이 불러줘서 스카이박스에 갔고, 한 번은 단체로 가서 1루에 앉았다”며 “우리가 1000명 정도 되니 응원을 한 번 해보려고 호루라기를 꺼냈더니 경호원이 와서 제지를 했다. 단상 위주로 돌아가는 문화이니 이해는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며 아쉬워했다.

 특히 “80~90년대에는 어디서 누가 응원을 해도 막고 이런 게 없었고, 클리닝 타임 이럴 때는 꼬마들을 단상에 올려서 춤도 추게 하고 홈런 인형도 선수한테 가져다가 쥐여주고 했다”며 “1루, 3루, 외야 상관없이 온 야구장이 잔치였는데 세대 차이가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또 “선수들도 정이 없다. 싸인도 안 해주고 그냥 가고 이러다 보니까 더 관심 밖으로 가고 다가갈 수 없게 된다”며 “해태가 지금의 기아보다 지역색도 강하고 했지만 팬들에게 싸인도 잘 해주고 관중을 끌어들이려고 했었는데 안타까운 부분이다”라고 강조했다.

 비록 구단 매각 과정에서 응원단장 직을 내려놓긴 했지만, 쓴소리를 아끼지 않을 만큼 타이거즈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그는 “해태가 우여곡절 끝에 기아가 됐지만 강한 팀으로 남았으면 좋겠고, 근성이 있었으면 좋겠다”면서도 “이종범 같은 선수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김)종국(감독)이가 잘 해도 선수들이 근성 있게 안 하면 야구를 못 한다. 지금 선수들은 근성을 갖고 더 할 수 있도록 허슬플레이도 보여주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물론 돈도 많이 벌고 오래 야구를 해야 하니까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아쉽다”며 애정 어린 쓴소리를 던졌다.

 또한 “(이)종범이가 자기 하고 싶은 걸 다 한 것 같지만 처음에는 김응용 감독이 못하게 했다. 안된다고 했는데 플레이가 안되니 종범이 마음대로 해보라 그랬다. 그러니까 야구장을 휘젓고 다녔다”며 “김도영, 정해영은 아직 약하고 한기주, 김진우는 떠났고, 이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가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으니 점점 팬들이 멀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나란히 앉아 막창을 구우며 대화하는 김창규 전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 부부.
나란히 앉아 막창을 구우며 대화하는 김창규 전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장 부부.

 “3위 이하 떨어지면 야구 자체 침체 우려”

 특히 “최근에는 크게 이기고 있다가도 뒤집혀서 져버리는 경기도 있었다. 1:0, 2:0 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지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며 “해태가 기아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타이거즈이기 때문에 우리 광주의 근성을 갖고 잘 했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아울러 “내년에는 3위 정도 했으면 좋겠다. 엘지나 롯데도 같이 잘해야 되겠지만 일단 기아가 잘해야 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며 “그 이하로 떨어지면 야구 인기 자체가 침체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5위나 4위는 너무 아슬아슬하니까 3위 정도는 해서 전체적으로 분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타이거즈 팬들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김 씨는 “팬들이 가게에 자주 와서 중계도 보고 야구 얘기도 하고 한다. 나도 그렇지만 이분들도 오랜 팬이다 보니 지금도 기아라고 안 하고 해태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며 “그 시절 추억도 하고, 자주 오는 팬들은 ‘올해 몇 위 하겠냐’, ‘오늘 몇대몇 나겠냐’하고 내기도 하자고 한다”고 언급했다.

 끝으로 그는 “우리 순돌이네 생막창은 다른 집 막창하고 좀 다르다. 고소한 맛이 오랫동안 입에서 남고, 비법이 있어서 냄새도 안 나고 딱딱하지도 않다”며 “물가가 많이 오른 상황에서도 애기 엄마의 고집 때문에 단가를 지키고 있는데, 내년에는 상황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항상 우리 가게를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고맙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한규빈 기자 gangstar@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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