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 북문밖거리 공북루 으리으리

공북루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화루 모습..
공북루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화루 모습..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여 년 즈음, 공북루 주변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북문을 나서 공북루에 이르는 길은 흙길이었다. 요즘 같이 메마른 계절이면 그 길바닥은 바위처럼 단단해졌고 바람이 빗질 하듯 휩쓸고 지날 때면 흙먼지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리고 이런 길을 따라 자그마한 초가집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고, 이들 초가집들이 울타리 삼아 쌓은 돌담들이 길의 형상을 더욱 또렷하게 그려보였다.

 또한 길섶 중간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초병들처럼 지키고 있었다. 공북루 바로 안쪽에도 제법 큰 고목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물론 누문 밖 빼곡하게 들어찬 ‘유림숲’과 견주면 조금은 초라해 보였지만, 그래도 이런 고목들과 돌담 덕분에 길섶 바깥의 너른 논밭들과 길은 확연하게 구분됐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북루를 통해 드나들었던 이 길을 당시엔 ‘북문밖거리’라 불렀을 것인데 오늘날 우리가 ‘충장로’라고 부르는 길의 일부가 그것이다.

 한편 실학자 유형원이 ‘동국여지지’에서 큰 길 가운데에 떡 버티고 섰다고 한 공북루(유형원의 표현대로 한다면 절양루)는 당시 북문밖에서는 가장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측면 2칸이었던 이 누각에 오르면, 광주천과 그 주변의 들녘이 한 눈에 굽어보일 만큼 높았고 온통 편평한 들녘 위에 산처럼 우뚝 솟아 더욱 도드라져 보였을 것임에 분명했다.

 이런 공북루는 20세기 초엽까지도 이 일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였다. 1900년대 일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라는 사람이 광주를 답사하며 이 누문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가 이 누문 위에서 북문 쪽을 향해 촬영한 사진이 그의 책 ‘조선기행록’에 실려 있는데, 우리가 공북루와 북문 사이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 찍은 사진 덕분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공북루를 북문 위에 있었던 또 다른 누각, 즉 북문루와 왕왕 혼동하여 북문루를 누문이라 칭하기도 하고, 공북루를 성문이란 뜻으로 읍문(邑門)이라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무렵 일본인들이 ‘광주의 읍문’이라 소개한 사진들이 과연 북문루와 공북루 가운데 어느 것을 촬영한 것인지 헷갈리는 때가 많다. 이런 현상은 드물게,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광주 땅을 밟은 조선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구례군 운조루의 류씨 집안 사람인 유형업이 쓴 일기인 ‘기어(紀語)’ 1916년 10월5일자를 보면, “북문이 곧 누문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광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공북루만을 누문이라 불렀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일기는 광주의 옛 누각들이 어떻게 시간의 저편 너머로 사라져갔는가를 시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더 주목된다.

 그 다음 날짜의 일기에서 유형업은 이런 요지의 기록을 남긴다. ‘북문루’는 마치 큰 산과 같이 웅장하고 수십 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독부가 이를 철거하려 했다. 그러자 광주군청에서 300냥을 지급하고 사들여 다른 빈터로 이축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여기서 말하는 ‘북문루’는 공북루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기를 쓸 무렵 일본인들은 광주읍내 일원의 상세한 지형도를 작성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지형도에 북문루를 비롯해 광주읍성의 네 성문 누각은 기록에 빠져 있다. 이미 철거됐기에 지도에 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북루만은 지금의 충장로5가와 독립로가 만나는 네거리 근처에 있다고 표시하고 있다. 유형업이 말한 누문이란 바로 이 공북루였을 것인데 광주가 초행길이었던 그는 이를 북문루로 착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공북루를 다른 곳으로 이설했다면 그 누각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광주의 읍성 등이 철거된 시점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기록이 없지만 황성신문 1910년 1월23일자에는 광주군 성벽과 문루를 철거한 뒤에 거기서 나온 토목재를 재활용하겠다고 전라남도 관찰사가 중앙부처에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읍성의 네 성루는 이 무렵에 완전히 제 모습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형업이 북문루로 착각하긴 했으나 공북루는 성루들과는 다른 운명을 겪었다. 과연 공북루는 어디로 이설돼 어떻게 쓰인 것일까?

 1920년대에 광주에는 북사정(北射亭)이란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지역 유지들이 북문밖 주민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설립할 때 회합장소로 이용됐다면서 당시 신문에 잠깐 등장한다.

 그런데 이 건물을 일러 북사정이라 한 것은 오랜 생활 관습상 옛 북문밖 일대에 있었던 것에서 붙여진 것인데 동시에 그 반대편인 남문밖, 지금의 조선대 장례예식장 일대에 남사정(南射亭)이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부른 이름이기도 했다. 필자 생각에 유형업이 다른 곳으로 이설됐다고 말한 공북루는 이 시기에 북사정으로 사용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위치에 대해 1960년 대에 발간된 ‘광주시사’는 비록 전해지는 말이란 전제를 깔며 북사정이 광주구역 일대인 대인동에 있었다고 했다.

 물론 북사정의 위치나, 북사정이 본디 공북루를 해체 복원했던 것이라는 주장 등은 명확하지 않다. 아직도 우리는 공북루의 역사에 수많은 빈칸이 있고 이런 빈칸을 당분간은 사실과 추정, 그리고 정황 등을 통해 보충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공북루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1년 11월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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