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는 광주 갈피갈피]굽은 기둥에서 옛 삶을 훔쳐보다
시인 박용철이 태어난 곳, 광산구 소촌동의 용아 생가라 부르는 곳을 가본 사람들은 그 집에서 어떤 느낌을 받을까?
남도의 질박한 감성을 녹아낸 시인의 집이라 생각한다면 용아 생가는 적당히 단출하면서도 단아한 품위가 있어 보인다. 분명 용아 생가는 남구 양림동의 쩌렁쩌렁한 고택들만큼 크고 화려한 느낌은 없다. 지붕조차도 양림동의 고택들이 기와를 얹은 것에 비해 용아 생가는 차분하게 볏짚을 둘러치고 있어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이 집이 한때 광주에서 내놓으라 하는 대지주의 살림집이었다고 생각하면 집의 규모와 위세는 기대 밖이란 느낌을 준다. 박용철의 집안은 예로부터 송정리 일대에서 위세 당당한 지주 가문이었고, 특히 그의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광주 바닥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부호였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용아 생가에서 그런 느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 집의 주인이 당대를 호령하던 부호였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집은 볼품이 없다는 느낌마저 준다.
본디 19세기 후반에 지었다는 이 집은 특히 사랑채와 안채를 떠받치는 기둥들 가운데 온전한 것이 드물다. 사랑채 왼쪽의 기둥은 너무 휘어 금방이라도 팝콘처럼 집 전체가 터져나갈 기세다. 당대를 주름잡던 부호가 뭐가 아쉬워 집을 이렇게 기괴하고 코믹하게 지었을까? 그 깊은 내막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우리 지역엔 이처럼 휜 기둥을 가져다가 지은 집들이 많다. 구례 구층암은 모과나무를 베어다가 세운 것으로 유명하고 그 구층암의 본사인 화엄사의 보제루란 건물은 통통하지만 분명 굽은 나무들을 베어다가 받치고 있다. 화순 물염정의 기둥 가운데 하나도 굽은 배롱나무를 가져다 세운 것인데 언제부턴가 정자 자체보다도 이 울퉁불퉁한 배롱나무 기둥이 더 명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미학적 독창성? 심각했던 목재난?
전북 고창의 선운사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선운사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대웅전 뒤편에는 500년 된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고 인근 진흥암이란 석굴 앞에는 600년 된 소나무가 서 있다. 더욱이 선운사 일대의 울창한 숲은 가을마다 곱게 물들어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임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절의 심장인 대웅전은 정작 굽은 나무기둥들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 대웅전 옆의 관음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간혹 곧은 기둥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다.
심지어 대웅전과 마주한 만세루란 건물은 모든 굽은 것의 박람회를 보여주는 듯하다. 곧게 뻗은 기둥은 찾기 어렵고 그 마저도 군데군데 짜깁기를 해 나무가 아니라 마치 레고블록으로 지은 집 같다. 흔히 빗살처럼 곧고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곤 하는 서까래마저도 만세루의 것은 온통 굽은 것이라 마치 말라비틀어진 면발처럼 제멋대로다.
이처럼 굽은 목재를 써서 지은 집들은 왕왕 우리의 눈길을 끌고 더불어 갖가지 상상력이 보태지면서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때는 이처럼 굽은 목재를 써서 지은 집들을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미인양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옛 기록을 걸신들린 듯이 찾아 해매는 연구자들이 많아지면서 이런 현상은 조선후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심각했던 목재난을 반영하는 것이란 의견이 늘고 있다. 그래서 굽은 목재를 베어다가 지은 집을 한껏 미학적인 독창성이나 자연미의 극치, 혹은 곡선의 아름다움으로 치켜 올리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굽은 목재, 가난했던 시절의 흔적?
실제로 목재공급이 조금 나아진 시기에 지은 집들은 보면 우리 건축의 곡선이 우리가 늘 선호했던 취향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광산구 월계동에는 탐진 최 씨의 사당 겸 서원인 무양서원이 있다. 이 건물의 건축과정을 기록한 ‘무양서원지’에 따르면 서원은 1920년대 후반에 지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 용아 생가와 같이 굽은 목재를 사용한 예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무양서원지’에는 이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된 목재들이 건축 당시 압록강에서 벌목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구 사동에 지금도 위용을 뽐내고 있는 이른바 최부자집도 마찬가지다. 이 집의 건축 시기는 그 상량문을 통해 1940년대 초엽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건축에 사용된 목재 중 굽은 것은 거의 없다. 비록 이 집이 온전히 한옥의 전통을 고수한 것은 아니지만 목재공급이 풍부하면 굳이 굽은 목재를 가져다 쓸 이유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그렇다면 굽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건물들이 한때 목재가 부족했던 시절, 다시 말해 가난했던 시절의 우울한 흔적으로만 봐야 할까?
우리네 옛집들 가운데 곧고 반듯한 것은 많다. 굳이 그런 사례들을 더 캐물을 것도 없다. 굽은 기둥과 뒤틀린 서까래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사실은 곧고 반듯한 집들이 훨씬 더 많은 데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천편일률의 관습에 반해 뭔가 토라지듯이 뒤엉킨 생김새, 이 반란의 미학이 우리네 옛집들 전체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더러 이런 뒤틀림이 세상 속에서도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는지 모른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3년 11월 작성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