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 34. 라몬의 바다, 스콧 오델, 우리교육

필자는 그 동안 책을 읽고 조금씩 메모해 온 내용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책 소개와 정리, 간단한 소감, 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평가 등 책에 따라 달라진다. 읽기 편한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고 1차 목표는 100권이다. 100권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독자들과의 건강한 토론이라 믿고 있다.  <편집자주>

 

라몬의 바다, 스콧 오델, 우리교육
라몬의 바다, 스콧 오델, 우리교육

 새해가 되어 떡국을 먹은 어린 유치원 아이가 한 살 더 먹었다고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이 지긋하신 분을 ‘어르신’이라고 불렀다가 “내가 왜 어르신이냐”고 야단을 맞기도 합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한 살이라도 더 나이 들어 보이려 하거나 어른 대접 받고 싶어하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어르신’이라고 높여 부르면 화를 내는 우스운 일들은 아주 익숙한 풍경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되면 ~” 하고 벼르기도 하지만, “어른 노릇 하기, 참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합니다.

 ‘어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결혼을 한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은 “나이만 먹었지 어른도 아니여.” 하거나, “무슨 어른이 그래요?” 하는 말을 쉽게 하거나 듣기도 합니다. 이 말들에 배어 있는 ‘어른의 의미’를 국어사전을 참고해서 풀어 보면, “결혼했거나 윗사람이라고 해서 어른이 아니고, 자기가 한 말과 일에 책임을 졌을 때 어른”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럴 때의 ‘어른’은 ‘우러러볼 수 있다’는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른’의 의미를 개인을 넘어 조직이나 단체, 정당과 국가기관, 더 나아가 한 나라의 통치자로 확장해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참 어른’, ‘진정한 리더’, ‘존경할 수 있는 통치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정의 또한 부족합니다.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를 따져 보면, 이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진다면서 하는 말과 행위가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이전 사람들이 했다”는 ‘책임회피’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으며, ‘심각한 폭력’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과 상대집단/정당/국가를 ‘악마화’하기도 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복수’와 ‘응징’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과 ‘진리’가 도전받으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과 문제제기 자체를 ‘배신자’라거나 ‘가짜뉴스’와 ‘음모론’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하는 말과 행동만이 ‘사실’, ‘진실’이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확증편향에 물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로 매도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 상대방과 상대집단/정당/국가를 공격하게 됩니다.

 ‘자전거 도둑’(박완서)의 수남이가 그리워했던 ‘어른’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작품이 발표되었던 시대뿐 아니라 어느 시대고 항상, 필연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는 그런 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라몬’의 이야기를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라몬의 바다’는 “1318문고”라고도 하는, “어린이청소년 소설”입니다. 동화라고 하기에는 담겨 있는 내용이 수준이 높고,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글씨 크기와 일러스트 등이 다소 어려보입니다. 하지만 라몬이 여러 사건들을 통해 ‘어른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면서도, ‘이성’이 어떻게 ‘광기’로 변할 수 있는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겸손’을 깨닫는 걸 고려하면, 어른들이 읽어도 참으로 감동스런 작품입니다.

 거기에 작품의 구조와 인물들의 갈등, 사건의 전개 과정 등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닮았습니다. ‘모비 딕’의 청소년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차이점 또한 명확합니다. 그래서 ‘모비 딕’을 읽지 않았거나 몰라도 ‘라몬의 바다’를 읽다 보면 그 내용에 흠뻑 빠져 읽게 됩니다.

 필자는 ‘라몬의 바다’를 ‘이성’, ‘신념의 광기화’, ‘존중과 겸손’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 라몬이 깨달았다는 ‘그날’, 또는 ‘그날의 사건’의 의미를 밝혀보면서 ‘우리 시대의 어른’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왼쪽 상단 반도 윗부분이 바자캘리포니아(출처: http://www.gettyimages.com/illustrations/nuevo-leon)
왼쪽 상단 반도 윗부분이 바자캘리포니아(출처: http://www.gettyimages.com/illustrations/nuevo-leon)

 ▶작품 소개와 배경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열여섯 살 라몬은 최근 세 가지 사건을 겪게 됩니다.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을 ‘어른’으로 인정해 주었지만, 라몬은 ‘스스로’ 마지막 세 번째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날”,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작품은 쥐가오리 신으로부터 살아 남은 라몬이 몇 개월 전부터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회상하면서 마지막 깨달음까지를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진주를 캐서 판 돈으로 먹고 살아가는 라 파즈(멕시코 바하캘리포니아 수르주의 주도이자 상업도시, 위키백과) 사람들과 바로 북쪽의 바자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못이 박히게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쥐가오리 신’ 이야기입니다. 100여 년 전 리나레스 신부님이 처음 발견한 이후 ‘쥐가오리 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 모습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왔지만, 그걸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쥐가오리 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해를 돕자면, “울면 호랑이가 잡아 간다”는 속담을 떠올리면 됩니다. 아주 어릴 때나 믿었을까, 누구도 믿지 않았던 속담. 그런데 라 파즈에서 ‘쥐가오리 신’의 존재는 좀 특이합니다. “학교 교육”을 받았기에 라몬을 비롯한 아이들과 어른들은 ‘쥐가오리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원주민들과 일부 사람들은 ‘쥐가오리 신’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전통과 현대’, ‘야만과 문명’, ‘미신과 이성’의 갈등/공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될수록 상식적으로 결코 흔들릴 거 같지 않던 ‘이성적 사고’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미신으로 취급했던 ‘쥐가오리 신’과 ‘

쥐가오리 신의 저주’가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라몬마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게 되고 급기야 마돈나보다도 쥐가오리 신의 저주와 복수가 무서워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선원들 중 오직 세빌라노만이 ‘쥐가오리 신’을 ‘미신’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본명은 ‘가스파르 루이즈’로 스페인의 세비야 마을에서 살다 왔다고 소개한 후 마을 사람들이 그를 ‘세빌라노’로 부르고 있습니다. “커다란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아주 단단한 체구”를 가진데다 물 속에서 3분 이상 잠수할 수 있는 “최고의 진주잡이”입니다. 페르시아 황제에게 진주를 팔았다는 등 허풍이 심한데, 진실은 쿠리아칸에서 평생 살았던 소문난 싸움꾼이었고, 그곳에서 사람을 죽이고 라 파즈로 도망쳐왔습니다.

천상의 진주를 사무실로 가지고 가는 라몬을 사람들이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다.
천상의 진주를 사무실로 가지고 가는 라몬을 사람들이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다.

 ▶라몬에게 일어난 세 가지 사건

 어른이 되고 싶었던 라몬은 세 가지 사건을 겪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아버지가 라몬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자신을 ‘동업자’로 인정해 준 겁니다.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벌이던 아버지는 파티 절정의 순간 ‘살라자르와 그 아들’이라 금박 글씨가 쓰여 있는 간판을 사무실 문에 걸게 합니다. 내 아들이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선언을 했던 거지요.

 하지만 라몬이 자부심을 느끼던 그 순간 아버지 살라자르는 “라몬, 소매를 내리거라.”고 말합니다. 라몬의 가는 팔뚝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죠. 동업자가 아닌 조그만 소년으로 보는 겁니다. 라몬이 얼마나 창피했을지, 순신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맛보았을 거라는 걸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아버지가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발생합니다. 라몬은 한 달에 한 번 진주를 팔러 오는 루존 노인에게 일부러 값을 후하게 쳐준 후, 잠수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진주를 캐 당당히 어른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컸던 거지요. 라 파즈에서 35킬로미터쯤 떨어진 산호초 섬에 살고 있는 루존 노인은 그곳에 쥐가오리 신이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노여워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진주를 캐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노인의 미신을 마음속으로 비웃으면서 잠수를 배우던 라몬은 나흘째 되는 날 엄청난 크기의 흑진주 ‘천상의 진주’를 캐게 됩니다.

 돌아오는 내내 커다란 쥐가오리 신이 둘의 카누 뒤를 따라오더니 급기야 물보라를 일으키고 카누를 산산조각 내 버립니다. 어렵게 해안가로 오른 루존 노인은 두려움에 떨며 ‘천상의 진주’는 쥐가오리 신의 것이기에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쥐가오리 신이 진주와 함께 라몬의 목숨을 빼앗아 갈 거라면서.

 하지만 루존 노인의 두려워 떠는 말이 라몬의 귀에 들릴 리 없겠지요. 이를 무시하고 15킬로에 이르는 긴 해변가를 걸어 라 파즈로 돌아옵니다. 이미 라몬이 ‘천상의 진주’를 발견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져 있었고, 돌아온 아버지 또한 진주를 감정하고는 ‘천상의 진주’임을 선언합니다. 온 마을 사람들의 축하와 축복이 이어지고, 축제가 벌어집니다. 라몬은 이제 어엿한 ‘어른’일 뿐 아니라 전무후무한 ‘최고의 진주잡이’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진주 상인들과 ‘천상의 진주’ 가격을 흥정합니다. 그런데 거래가격이 맞지 않자 상인 한 명이 과거 아버지가 멕시코 시까지 갔다가 낭패를 보았던 일을 언급하면서 우리들과 거래하지 않으면 또다시 “꼬랑지를 뒤꽁무니에 내린” 모습이 될 거라 약을 올리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거래를 중단하고 신부님을 모셔 오게 한 후, 천상의 진주를 마돈나에게 바치겠다고 해 버립니다. ‘헌물’을 한 거지요.

 마을은 또다시 축제가 이어집니다. 갈라도 신부님의 미사 이후 마을 사람들은 손에 천상의 진주를 들고 있는 마돈나를 앞세우고 마을 광장을 돌고는 마지막으로 살라자르의 선단에 도착합니다. 신부님은 선단의 안전한 귀항과 살라자르 가문의 영광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출항했던 배들이 폭풍우를 만나게 되는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서른두 명의 선원 중 세빌라노뿐입니다.

 라몬은 그때서야 ‘쥐가오리 신’에게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급기야 몰래 성당으로 들어가 마돈나에게서 천상의 진주를 훔쳐 카누를 타고 다시 산호초 섬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라몬은 자신을 성당에서부터 뒤쫓아온 세빌라노를 맞닥트리게 됩니다. 작품의 절정인 세 번째 사건이 발생합니다.

 신념이 광기로 변할 때 : 살라자르와 세빌라노

 다섯 척의 선단을 보유하고 있고 뛰어난 보석감정사인데다 보석상인이기도 한 라몬의 아버지 살라자르는 그 명성이 인근의 도시뿐 아니라 멕시코 시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진주가 품질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허풍도 심하고 부잣집 아들 라몬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선원 세빌라노는 진주와 돈을 밝히면서 폭력도 불사하기에 둘의 공통점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필자가 볼 때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주변의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어떤 말도 듣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만을 정답이라 확신한 채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지극히 이성적인 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실은 자기만의 신념 체계 안에서 사고하며, 그 틀을 벗어나는 사건과 현상을 맞닥트리면, 이해와 수용 대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고 합니다. ‘인지부조화 이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를 ‘신념의 광기화’로 읽어 보려고 합니다. 이들의 신념이 행동으로 옮겨졌을 때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끔찍한 파국’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진주’를 다듬고 있는 살라자르
‘천상의 진주’를 다듬고 있는 살라자르

 1. 살라자르-서른한 명의 선원들을 죽게 하다

 살라자르는 그동안 수많은 폭풍우에도 이를 잘 헤쳐나온 “아주 훌륭한 선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세빌라노의 증언을 참고해 볼 때 왜 평범한 폭풍우인데도 휩쓸리게 되었을까요. 세빌라노는 라몬을 뒤쫓아 칼로 협박하여 천상의 진주를 훔친 후, 뒤따르는 쥐가오리를 무서워하는 라몬에게 어이없어 하며 아버지의 선단이 침몰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바람이 심해지고 남쪽 하늘에 엄청난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할 때 나는 자네 아버지에게 라스 아니마스 방향으로 돌려서 폭풍을 피하자고 말했어. 자네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하더군. 바람이 우리 편이기 때문에 폭풍이 불기 전에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 나는 네 아버지가 말하는 방식을 통해서, 신이 자신을 돕기 때문에 폭풍 같은 건 불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살라자르는 마돈나에게 ‘천상의 진주’를 ‘헌물’했기 때문에 신이 자신과 선단을 지켜줄 거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신을 믿든 안 믿든 신에게 돈이나 물건을 바치고 그 대가로 무엇을 보장해달라는 이른바, ‘신과의 거래는 거짓 믿음’이라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지요. 파우스트 박사처럼 악마와 거래할 수는 있어도 신과 거래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신은 거래가 성립되었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착각’이라고 합니다. 그 착각이 심하면 ‘확증편향’, ‘자가당착’이라고 하지요.

 살라자르는 라몬이 발견한 천상의 진주에 흠이 있는 걸 발견하고 정성을 들여 흠을 제거한 후 비싼 값을 받고 팔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거래가 뜻대로 되지 않고 상인 중 한 명이 자신의 과거의 원한을 상기시키자 갑작스럽게 마돈나에게 진주를 바칩니다. 누가 보아도 신에 대한 경외심과 찬양이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 하에, 차라리 자신과 가문과 선단을 위해 헌물하여 축복을 받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던 거지요.

 이런 판단을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물건과 돈으로 어떤 대가를 바라며 헌금과 헌물을 하는 건 자유이니까요. 그러나 그걸 바탕으로 자신이 마치 신의 계시를 받아 홍해를 두 쪽으로 갈라 유대백성을 구한 모세인 거처럼 뻔히 다가오는 폭풍우 한복판을 뚫고 지나가겠다고 행동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믿음과 신념으로 서른한 명의 선원을 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과 신념은 ‘극단적인 만용’이자 ‘광기’ 그 자체일 뿐 아무것도 아닌 거지요.

 

작살을 놓지 않은 채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세빌라노
작살을 놓지 않은 채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세빌라노

 2. 세빌라노 - 자신을 죽이다

 세빌라노는 ‘천상의 진주’를 훔치러 성당에 들렀다 라몬이 먼저 훔쳐 산호초 섬으로 가는 걸 몰래 뒤쫓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칼로 라몬을 위협하여 진주를 훔친 후, 과이마스 시로 운행하게 합니다. 살라자르 가문의 이름으로 진주를 팔면 자신이 혼자 가서 팔 때보다 10배는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면서.

 세빌라노는 뒤따라오는 쥐가오리를 무서워하는 라몬을 비웃으며 다음처럼 말합니다.

 “쥐가오리 신! 무식한 원주민들이 쥐가오리 신을 믿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책 읽는 법을 배운 사람이, 위대한 살라자르 가문의 장손이 그런 미신을 믿다니 ….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다니 기절초풍할 노릇이구만!”

 하지만 쥐가오리 신은 며칠 동안이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쫓아오는 걸 멈추지 않습니다. 쥐가오리 신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사정거리 안으로 다가오자,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지내던 세빌라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살을 던집니다. 작살 끝에 달린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보트가 끌려가지만, 쥐가오리 신은 이들이 가고자 하는 반대 방향으로 이끕니다.

 “두 눈에서 이상한 광채”를 번뜩이던 세빌라노는 줄을 조금씩 당겨 뱃머리에 단단히 묶더니 라몬에게 “쥐가오리가 물 밑으로 잠수하기 시작하면 줄을 잘라 버리라”고 말합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의 순간에도 라몬까지 죽게 할 수 없다는 ‘이성적 사고’가 작동한 거죠.

 동시에 세빌라노는 공중으로 몸을 날려 쥐가오리 신의 넓적한 등에 뛰어내려 작살이 있는 곳까지 기어가더니 한 손으로는 작살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들어 쥐가오리 신의 목덜미를 내리찍습니다. 쥐가오리 신이 피를 튀기며 요동을 쳐도 무릎을 꿇은 채 작살을 더 깊이 박으려는 세빌라노에게 보트에서 끊어져 나간 밧줄이 뱀처럼 날아가더니 세빌라노를 휘감아 버립니다. 하지만 세빌라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둘은 그대로 바닷속으로 들어가더니 소식이 없습니다. 라몬이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맴돌았는데도.

 세빌라노는 ‘쥐가오리 신’과 대결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미신’이라며 쥐가오리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냥 무시하고 피해도 되었겠지요. 무엇이 세빌라노에게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게 했을까요. 필자는 그것을 지금까지 선원의 ‘경험’에서 오는 ‘자신만의 확신’이라고 읽습니다. 자신은 이미 “쥐가오리를 아홉 마리”나 죽였고, 그것은 “똑같은 크기의 고래를 죽이는 것보다도” 더 쉽기 때문에.

 하나 더 말하자면, 자신이 질투하는 라몬이 한낱 쥐가오리일 뿐인데, 덩치가 크다고 ‘신’으로 믿고 무서워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대상’을 제압해야겠다는 내면의 ‘욕망/의지’도 한 몫 했을 거 같습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오는 ‘확신’과 사람들이 믿고 있는 ‘미신’을 내가 깨부수고야 말겠다는 ‘욕망/의지’는, 살라자르의 경우처럼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 또한 개인의 자유이니까요. 그러나 그의 확신과 욕망/의지, 그것들의 정수로서 만들어진 ‘그의 신념’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행위로까지 이어져 죽음에 이르렀다는 걸 볼 때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신념이 ‘자기 자신의 파괴’로까지 이어지는 걸 볼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은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 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적인 신념은 자신과 ‘다른 신념’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문을 닫아 버리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영역을 호기심과 탐구심, 진리에 대한 갈망이 아닌, 깨부수고, 죽이고, 정복해야 할 존재로서 ‘악마화’할 뿐입니다.

 

성당 종을 치는 라몬.
성당 종을 치는 라몬.

 라몬, 광기를 넘어 존중과 겸손을 배우다

 마을로 돌아온 라몬은 성당으로 들어가 마돈나의 손에 흑진주를 놓으며 말합니다. “이번에는 찬미의 선물,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세빌라노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 쥐가오리 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종탑에 올라 종을 울립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날은 내가 어른이 된 첫날이었다. 내가 어른이 된 날은 내가 살라자르 진주 판매 회사의 동업자가 되던 날도, 천상의 진주를 발견하던 날도 아니었다. 내가 어른이 된 날은, 바로 그날이었다.

 라몬이 말한 “바로 그날”은 세 번째 사건을 겪은 날입니다. 라몬은 왜 “바로 그날”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했을까요. 라몬은 쥐가오리 신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를 ‘신’으로 인정한 걸까요. 그렇다면 하느님과 마돈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작가는 더 이상의 서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 그것이 16살 청소년의 실제적인 내면의 모습이기도 하겠지요.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지만 그걸 명확하게 풀어내지는 못하는 게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열린 결말’입니다.

 필자는 라몬이 깨달은 건 이 세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존중’과 이와 함께 필연적으로 한 쌍으로 다가오는 ‘겸손’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든 나무들을 존중하면서도 수백 년 된 오래된 나무를 인정하여 보호하는 거처럼. 심지어 살아 있지 않은 존재들에 대해서도 감사와 존중의 마음을 담아 ‘문화재’로 보호하고 보존하기도 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지지요.

 ‘쥐가오리 신’ 또한 모든 바다 생물처럼, 여느 쥐가오리처럼 똑같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세빌라노 또한 극단적인 신념을 가졌다 할지라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입니다. 흔들렸던 라몬 또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존중하겠지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갑니다. ‘어른’이란 그런 사람이겠지요. 절대자 앞에서 우리는 작지만, 사랑받기에 충분한, 귀한 존재이니까요.

 백청일(논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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