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광주까지 ○km’의 기점, 도로원표 변천사

▶1928년 개통 직후의 광주대교.
▶1928년 개통 직후의 광주대교.

 차를 타고 광주를 오가다보면 도로표지에서 이곳으로부터 광주까지 몇 km라는 문구를 보게 된다. 가끔은 이런 도로표지에서 말하는 광주는 어디를 말하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광주시청 앞일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정신적 구심점이라 여기는 옛 전남도청 앞의 광장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고속도로처럼 요금소를 지칭하는 것일까?

 고속도로의 경우에 광주 몇 km에서 광주란 지금 타고 있는 도로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요금소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방면에서 광주로 오는 이들에게 광주란 서광주 요금소일 것이고 순천 방면에서 오는 사람들에게는 동광주 요금소가 그 광주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금소가 없는 국도나 지방도에서 말하는 광주란 어딜까?

 이 경우에 광주란 도로원표, 즉 길의 출발점을 표시한 조형물이 서 있는 곳을 말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통령령으로 정해진 특정한 지점인데, 대개 그곳이 두 개 이상의 길이 교차하는 곳이므로 도로원표는 그런 교차점에서 조금 벗어난 근처에 서 있기 마련이다. 광주에서는 충장로5가와 구성로(옛 역전통)가 만나는 교차점에 해당하며 이 교차로 근처에 실제로 돌로 만든 도로원표 조형물이 지금도 서 있다. 즉, 국도 이하의 길에서 광주의 배꼽은 바로 이 지점인 셈이다.

 광주에서 이처럼 길의 기점을 정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라고 한다. 이 해 12월께 광주를 비롯한 전국의 도시들에는 이런 식으로 도로원표를 확정해 작은 표시물을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로원표 충장로5가-구성로 교차점

 그런데 지금과 다른 것은 당시 광주의 도로원표는 충장로5가와 구성로 교차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충장로5가는 광주시내(당시 행정구역상 광주면)에 속한 동네였지만 풍경은 거의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이었다. 대신에 생활관념상 시내의 북쪽 끝은 충장로3가와 중앙로가 만나는 교차점 근처였다. 따라서 도로원표도 그 언저리에 설치됐는데 그곳이 바로 옛 화니백화점 후문에서 광주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런 도로원표가 지금처럼 충장로5가와 구성로 교차점으로 바뀐 것은 1935년이었다. 이처럼 도로원표가 바뀐 과정에는 두 가지의 큰 변화가 작용했다. 구성로를 예전에 역전통이라 했듯이 이 길의 한쪽 끝에 과거 광주구역이 있었다. 지금의 동부소방소 자리인데 이 철도역이 1922년 여름에 생기면서 구성로는 새로운 시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철도역이 생기고도 13년 뒤에 도로원표가 이곳으로 이설된 것은 구성로의 반대쪽이 광주천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던 1928년 지금의 광주대로 자리에 새로 교량이 생겼는데 이것이 바로 광주 최고의 철근 콘크리트 교량으로 알려진 광주대교다. 이 다리는 광주공원과 시내를 잇는다는 점에서는 1917년께 가설됐다는 광주교(일명 공원다리)와 같았으나 광주교에서 약 100미터 아래에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과거 송정리로 가는 길로 불렸던 송정통(현 월산치안센터 앞 삼거리)과 바로 연결됐다. 따라서 지금처럼 광주의 도로원표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광주대교가 생긴 결과라 할 수 있다.

 군사적 고려로 정해진 다리 위치

 그런데 광주대교가 지금의 자리에 놓인 것은 당시 광주사람들의 바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원래 광주사람들은 기왕에 새 다리를 놓을 생각이라면 지금의 중앙대교 자리에 세워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는 중앙대교의 천변우로 쪽인 구동 37번지 일대에 광주사람들이 이용하던 시장이 있었고 이 때문에 시내 사람들은 단번에 광주천을 넘어갈 수 있는 이 지점에 새 다리가 놓이기를 희망했다. 그럼에도 한사코 중앙대교 자리를 피하고 광주대교 자리를 고수한 것은 이 지점이 광주역과 송정역을 이는 군사상의 필요에서였던 것 같다. 즉, 다리의 가설지점이 생활의 편익보다는 군사적 고려에 결정됐던 셈이다.

 한편, 오늘날 광주의 도로원표는 국도1호선의 통과지점으로 간주된다. 국도1호선은 목포를 기점으로 신의주를 종점으로 하는 길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 도로명은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없었던 말이다. 일제 때 도로는 보통 1, 2, 3등급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도로명도 시·종점에 맞춰 불렀는데 현 국도1호선은 경목선 또는 경의선이라 부르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현재처럼 숫자로 노선표시를 한 것은 1967년의 일이다.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군용지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도로를 숫자로 표시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군과 미군이 같은 도로를 각기 다른 숫자로 표시하면서 곤란한 점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에 1967년 이를 조정해 노선 숫자를 통일했는데 국도1호선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또한 이 해에 북한지역의 도로까지도 노선번호를 부여했다. 그래서 목포가 기점이고 다시 중간에 광주와 서울을 통과해 신의주를 종점으로 하는 국도1호선의 노선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길의 이름과 노선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생겨났다. 그리고 언제고 이 길은 다른 이름을 갖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언제든 이 길의 이름에 관계없이 우리가 길을 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2014년, 우리가 길 위에서 길을 잃는 일이 없기를 기원해 본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4년 1월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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