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광주 갈피갈피]광주 옛 남문로의 풍경
동구 남광주역 사거리에서 화순 방향을 따라 난 7~8킬로미터의 길을 남문로(南門路)라고 부른다. 길은 동구 선교동과 화순읍의 경계인 너릿재터널 중간쯤에서 끝난다. 이 길의 이름은 최근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붙여졌다. 광주시가 펴낸 ‘광주의 길 이름’이란 책을 보면, 남문로는 1992년부터 붙여진 것이라 한다.
같은 해에 광주에는 동문로, 서문로, 북문로란 이름을 가진 길도 생겨났다.
동문로는 풍향동 서방시장 사거리에서 담양군 경계선 근처인 석곡천까지 이어지는데 길이는 6~7킬로미터다. 서문로는 주월동 백운광장에서 남평 방향의 국도1호선을 따라 놓인 길로 남평과의 경계인 한둔재 혹은 한재라 불리는 고갯마루에서 끝난다. 길이는 9킬로미터를 조금 넘는다. 마지막으로 북문로는 운암동 동운고가도로에서 장성 방면으로 뻗은 길로 광산구 비아장을 조금 넘어서까지 이어져 있는데 길이는 8킬로미터 남짓 된다.
광주 원도심에서 주변으로의 통로
이들 길은 전통적으로 광주의 원도심에서 주변 지역으로 드나들었던 경로를 보여주는데 이는 과거 광주읍성 시절부터 인근 고을로 나다니던 통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남문로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그 경로의 구체적인 모습은 현재의 남문로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남문로의 본래적인 의미는 남문 터를 기점으로 한 것인데 남문은 옛 전남도청의 뒤편이자 역시 예전 대성학원 근처의 작은 사거리에 있었다. 현재 대성학원마저 원래의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그 터마저 아시아문화전당 부지에 편입되어 얼른 눈에 띄는 건물을 잡아 그 터를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다.
또한 이 남문 밖으로 이어지는 본래의 남문로 역시 충장로1가에서 광주은행 남부지점 앞을 지나 전남대병원으로 나 있는 이른바 인쇄골목길(일방통행로)이 아니라 남동성당 옆을 지나 전남대 의과대학 앞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현재 도로명 주소에서는 이 길을 전남대 의대 앞의 길(백서로)에 딸린 곁길이란 뜻으로 ‘백서로153번길’이라 부른다.
이 길이 과거 광주남문 밖의 큰 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전남대 의대 입구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함께 1640년대 광주목사를 지낸 신익전이란 사람의 선정비가 서 있다. 신익전은 광주목사 재임 중에 군량미가 빈 것을 채우고 환곡의 문란을 바로 잡았던 일이 있었는데 비석은 이 일을 기념한 것인 듯하다.
그런데 이 비석은 옛 광주사람들에게는 광주의 남문 밖을 진호하는 비석이란 의미로 진남비(鎭南碑)로도 불렀다. 실제로 신익전의 선정을 기리는 비문 뒤편에는 천년완골(千年頑骨)이란 큼직한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 말은 세세토록 이곳을 굳게 하게 지켜주소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커다란 홍살문도 하나 서 있었는데 그 세워진 내력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남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인상적으로 비쳤던 것 같다. 이 홍살문은 1900년대까지 남아 있었으나 그 뒤에 철거됐다.
과거 한적했던 남문 밖
한편 1900년대까지도 남문 밖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하기만 했다. 진남비와 그 옆의 느티나무 일대를 조금만 벗어나기만 해도 당시 이 일대에는 아무런 마을이나 민가가 없었다. 1915년 전남대병원의 전신인 도립의원이 광산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도립의원과 광주천 사이는 온통 황무지였고 그런 의미로 사람들은 이곳을 일러 ‘묵은 바탕’이라 부르곤 했다.
또한 이처럼 한적하고 막막했던 땅이었기에 생겨난 경관이 있었다. 1930년 남광주역이 생기고 1970년대 남광주시장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인 1910년대에 남광주시장 일대는 화약고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화약고는 그 도난의 위험성 때문에 읍성 안에 있었는데 이 무렵에는 그 폭발의 위험성 때문에 남문 밖인 이곳에 설치됐다. 또한 인적이 드문 까닭에 활터도 이곳에 있었다.
흔히 조선 중엽까지도 활터는 읍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금의 금남로1가 일대를 사정리(射亭里)라 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지명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초엽에 이르면 읍성 안의 활터는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성 밖에 두 군데의 활터가 새로 생겨났다. 그 하나는 북문 밖의 활터로 일설에는 광주구역, 즉 동부소방서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이 북사정(北射亭)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남문 밖에도 새로 활터가 생겼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전남대병원과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사이를 잇는 능선 끝자락에 있었는데 이를 일러 남사정(南射亭)이라 했다. 이 활터와 정자는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놓이고 능선이 철길 개통을 위해 두 동강이가 날 무렵에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4년 2월 작성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