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광주목사 신석유 선정비
1869년 광주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김인성이란 자가 족손을 살해했던 것이다. 사건 당시 광주의 목사는 이정모였다. 2년 전에 부임해왔던 그는 이 사건으로 경질됐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광주 전체에도 연대책임을 물어 광주란 이름을 박탈하고 광산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원님의 지위도 목사에서 현감으로 내려앉혔다. 그렇게 해서 바뀐 광산현감으로 신석유가 왔다.
신석유가 새로 이름이 바뀐 광산에 와서 무슨 일을 하고 갔는지는 모른다. 대개 그렇듯이 간단한 행적만이 옛 읍지에 실려 있다.
그래도 그의 재직시절인 1871년 하모당이란 관아건물과 공북루이란 누각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이 해에 광산은 다시 광주로 이름을 되찾았고 원님의 지위도 현감에서 목사로 회복됐다. 그로 인해 신석유는 현감으로 왔다가 목사로 승진을 했다.
복룡마을 화재 뒤 재건 앞장…선정비
그런데 신석유는 그 이듬해인 1872년에 갑자기 해임됐다. 그 해에 전라감영에서 실시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그는 감독관으로 차출됐다. 시험을 앞두고 그는 감영이 있는 전주까지 행차를 했다. 하지만 정작 당일에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고 그냥 광주로 되돌아왔다. 병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시험 감독은 국가의 중차대한 일이라 조정에서는 그 책임을 물어 옷을 벗겼다.
조정의 평가와 달리 이런 신석유를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1871년 북구 신용동의 복룡마을에는 화재가 일어났다. 불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를 태웠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마을이 규모를 이루고 있게 된 데에는 당시 마을 재건에 앞장선 신석유의 공 때문이었다.
이에 복룡마을에서는 그를 기리는 선정비를 세웠다. 그런데 선정비는 1881년, 그가 광주를 불명예스럽게 떠난 지 10년 뒤에 세웠다. 비석이 이처럼 뒤늦게 세워진 연유는 알 길이 없으나 그에 대한 복룡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컸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신석유의 선정비처럼 광주에는 선정비가 많다. 다만 몇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광주공원의 한 귀퉁이에 몰려 있어 잘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신석유 선정비도 원래 복룡마을에 있던 것을 1970년대에 공원으로 옮겼다. 그러던 2011년에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비석을 다시 복룡마을로 옮겨 세웠다.
그런데 광주에 왔던 관원들 가운데 누구나 선정비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나 현감 혹은 판관으로 광주를 다녀갔다. 그들의 공과는 대체로 조선왕조실록 등에 단편적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중에는 내용이 꽤 상세한 것도 있다.
아마도 가장 자극적인 기록은 세종 때의 것이리라. 당시 목사 신보안은 기생 소매와 정을 통했다. 그런데 소매는 광주사람 노흥준의 애인이기도 했다. 신보안이 자신의 애인과 통정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흥준은 화를 참지 못했다. 평소 성격이 괄괄했던 노흥준은 백주에 관아로 쳐들어가 신보안을 난타했다. 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한동안 시끌시끌했다.
성종 때 판관으로 와 있던 우윤공의 행적도 수백 년 간 광주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중앙에 든든한 배경을 가졌던 우윤공은 목사 다음의 직책인 판관으로 있으면서 자못 일을 거칠게 처리했던 모양이다. 그로 인해 아전이나 향반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말을 타고 읍내를 가로질러 가다가 누군가 쏜 화살에 피격을 당했다. 평소 자신의 일처리에 불만세력이 많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그는 서둘러 가족을 데리고 밤새 무등산을 넘어 화순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으로 목사 유양은 부하관리를 잘못한 죄로 남평현에 갇혔고 수많은 광주사람들이 피의자 신분으로 체포당해 심한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끝내 범인을 잡히지 않았다.
또한 광주에 온 목사들 중에는 간혹 덜 떨어진 자들도 있었다.
중종 때 목사 장세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의금부 직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내가 나타나 대뜸 장세필을 관아 뜰로 끌러낸 뒤에 죄상을 열거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이 사내가 의금부 직원이 아닌 사실이 들통 났다. 아마도 한 무뢰배가 장세필로부터 금품을 뜯어내려고 벌인 수작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사건을 무마하느라 장세필은 사내를 단순히 훈계하고 풀어줬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이 세상이 알려지면서 장세필은 해임됐지만 몇 년 뒤에 복직되어 다른 고을의 원님으로 부임했다.
전대 의대 구내에 광주목사 신익전 선정비
이런 목사들과 달리 좋은 평가를 받은 지방관도 많았다. 인조 때 광주목사 신익전은 군사와 관련된 재정과 환곡, 즉 비축곡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해 칭송을 받았다. 그를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지금도 전남대 의과대학 구내에 서 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해놓고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신익전보다 앞서 광주목사를 지낸 이유달은 관아의 곳간이 빈 것을 패랭이와 철물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그 수익금으로 빈 곳간을 채웠다. 누적된 적자를 단번에 해결했으니 그 공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시쳇말로 이유달은 경영의 귀재였고 그 재능을 한껏 발휘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조정은 관아에서 영리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파직했다.
옛 지방관들의 사례가 오늘날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는 단체장이나 의원들과는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신석유의 경우처럼 현직을 떠난 10년 뒤에도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을 수 있는 공직자가 왔으면 하는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4년 3월 작성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