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 무대읽기] 연극 ‘연애하기 좋은 날’.
짧은 시간 채운 즐거움, 가벼운 힐링에 그쳐선 안돼
상무지구에 있는 ‘기분 좋은 극장’에서는 2월16일부터 ‘연애하기 좋은 날’이라는 새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관객과의 소통 부분이었다. 3월19일까지 이어지는 대장정의 첫 공연이어서 배우들이 마음먹고 열심히 한 덕분인지, 그날따라 마음을 열고 공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관객만 온 덕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배우와 객석의 소통은 근자에 보기 힘들 정도로 활발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이 연극은 다중 추돌이 일어난 교통사고 현장의 날카로운 음향으로 시작한다. 남녀 간의 연애 혹은 사랑은 사고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보여주는 장치일 수도 있겠다.
무대는 병원이다. 같은 교통사고를 당한 남자(지후)와 여자(시연)가 한 병실을 쓰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한 병실을 쓰게 된다는 설정이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연극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넘어간다.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중요한 대목이다.
지후와 시연은 사귀던 사이였는데, 시연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옛 애인이었던 지후를 몰라본다. 지후는 시연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만났으며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시연의 기억을 되돌려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연애하기 좋은 날’의 큰 줄거리는 헤어진 연인이 우연히 한 공간을 공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지나간 시간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는 중에 나타난 그들의 연애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평범하다.
‘연애하기 좋은 날’은 어떤 특별한 경우의 연애 사건을 보여주기보다는 젊은 관객이나 나이 든 관객이나 대부분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이고 주위에 흔히 있을 법한 연애를 보여준다. 아마도 그런 점에서 관객들이 그토록 호응을 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 가끔 문학예술에서 다루는 지독한 사랑이나 미칠듯한 사랑, 위험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서 말이다.
지후와 시연의 알콩달콩한 연애를 훔쳐보면서 관객은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사유하거나 고뇌할 필요가 없다. 연애하고 싶은 한 남자가 있었고 역시 연애를 하고 싶은 한 여자가 있었다. 그들 둘은 만나서 연애를 시작하고 어느 순간 연애를 끝낸다.
교통사고가 없었다면, 교통사고로 실려 온 환자가 많아서 병실이 부족하여 한 병실을 쓰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헤어진 상태 그대로 연애의 끝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한 병실을 쓰게 된다. 그들 둘은 운명이었던 것일까?
극의 마지막에 지후와 시연이 한 병실을 쓰게 된 것은 시연의 조작 혹은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사람 관계란 것이 대부분 그렇듯이 둘은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게 되는데, 시연은 한 병실에 지후와 자신을 몰아넣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하면서 끝나버린 연애의 불을 다시 지피려고 한 것이다. 이쯤 되면 여자의 적극성이, 노력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낸 결말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각도로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극 속에서 빈번하게 출몰하는 남녀에 대한 관점이다.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이렇고’ 식의 요즘처럼 성인지 감수성이 중요한 시대에는 맞지 않는 대사와 상황이 자주 나온다.
물론 관객은 그런 상황에서 즐거운 반응을 보이고 무대의 흐름을 정지시킬 정도로 추임새를 넣지만, 공연이라고 하는 것이 극작가나 연출의 생각이 관객에게 무의식적으로 주입되는 산물이라고 했을 때 불안한 지점이 있는 작품이었다.
‘기분 좋은 극장’에서 관객은 90분 동안 기분이 좋아져 나오기는 하지만, 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연애 혹은 사람 관계가 일반적인 표준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생각을 깊게 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걸로 된 것일까? 연극은 짧은 시간에 얕은 즐거움을 주면 그만인 것일까? 일상에 지친 사람들, 혹은 연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 연애를 못 해서 힘든 사람들에게 가벼운 힐링의 시간이 되면 연극은 제 사명을 다한 것일까?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