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광주읍성의 동문 ‘서원문’

나주읍성 서문인 영금문.  사진=김정현, 출처=나주시. 
나주읍성 서문인 영금문.  사진=김정현, 출처=나주시. 

 나주에 가면 현재 3개의 성문이 복원되어 있다. 동문, 서문, 남문이 그것이다. 이 성문들 외에도 나주는 객사, 내아, 정수루 등 옛 자취가 완연한 건물들이 남아 있어 시간의 깊이를 알게 해주는 도시이지만 무엇보다 우람한 성문이 있어 그런 느낌을 더욱 고조시킨다. 그 가운데 비교적 최근에 복원된 것이 서문이다. 서문은 객사에서 옛 주사청과 예조명당 터를 거쳐 향교로 가는 길에 있는데, 주변에는 초여름이면 보리타작을 했다는 보리마당, 1900년대 유진 벨 목사 등이 머물렀다는 곳이 있다.

 현재 복원된 서문은 웅장하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복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는 모양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동문이나 남문에 비해 서문은 그다지 크기 않았다고 하는데 복원과정에서 냉택없이 크게 지었다는 것이다.

 “서문, 냉택없이 크게 복원” 비판

 그 시비야 어떻든 이 문은 영금문(映錦門)이란 편액을 달고 있다. 그동안 ‘여지도서’ 등에 따라 서문의 이름은 그저 서성문(西城門)이라고만 전해져 왔는데 복원할 즈음 발견된 ‘나주목여지승람’이란 책에 근거해 영금문이란 이름을 확인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 필자가 그 문 앞에서 서서 받은 느낌은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의 그림자가 비치는 문, 혹은 그 산의 정기가 머무는 문이라는 의미처럼 보였다. 실제 그 의미가 다른데서 비롯됐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필자처럼 그 문 앞에 서본 사람이라면 분명 이런 느낌을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나주의 성문들에는 이처럼 각기 의미를 가진 편액들이 걸려 있다. 동문은 동점문인데 아마도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에 나온 구절을 옮긴 듯하다. 남문인 남고문은 남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는 의미인데 앞에 ‘없을 무’자가 보태지면 임금께서 남쪽의 일로 걱정하시 일이 없기를 바란다, 또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을 함축한 듯 보인다. 그리고 아직 복원되지는 않았지만 북문인 공북문은 말 그대로 북쪽에 계신 임금을 받든다는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이처럼 옛 성문들은 어디나 그 고을의 바람을 담거나 사연을 담기 마련이다. 옛 전라감영 소재지인 전주에도 과거 네 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동문은 완동문이라 했다. 전주의 별호인 완주의 동문이란 의미로 이렇게 지은 것이었다. 또 남문은 풍남문, 서문은 패서문이라 했는데 이는 조선왕조의 창업을 이룬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를 저 중국 한나라 건국자인 유방의 고향인 풍패에 빗대 각기 성문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었다. 물론 북문은 이곳 역시 공북문이라 해서 나주와 같았다.

 그런데 풍남문은 그 전에 명견루란 이름을 가졌는데 이것이 1700년대 불타 새로 지으면서 풍남문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됐다고 한다. 이는 다른 문들도 마찬가지여서 완동문의 전 이름은 판동문, 패서문은 상서문, 북문은 중거문이었다. 따라서 중도에 모두 이름을 고쳐 지은 것인데 이 시기는 1700년대였다.

 광주의 동문·서문에도 편액 걸려

 그렇다면 광주읍성은 어땠을까? 광주읍성의 4대문이 언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갖게 됐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동문의 정식명칭인 서원문과 서문인 광리문의 이름만은 그 출처를 가늠할 수 있다. 서원문은 광주의 별호인 서석의 동문이란 뜻이고 광리문은 광주 혹은 광산의 서문이란 뜻이다. 이 때 서원문의 원(元) 자와 광리문의 리(利) 자는 모두 ‘주역’에서 온 것인데 하늘 혹은 우주는 ‘원형리정’이라는 네 가지 속성을 지닌다는 첫 문장을 탐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네 글자로 실용적인 목적에 쓰곤 했는데 간혹 옛 책이나 족보에 이 네 글자가 있는 것은 순서를 표시하는 경우다. 또한 네 글자는 방위를 표시할 때도 사용했는데 광주의 동문과 서문이 이 경우에 속한다. 즉 원은 동쪽과 통하고 형은 남쪽, 리는 서쪽, 정은 북쪽과 연결 지은 것이다. 물론 모든 고을이 이런 예를 따른 것은 아니지만 도성의 북문이 숙정문인 것은 비록 한자는 다르더라도 그 음만은 북쪽을 뜻하는 정을 빌려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광주의 동문과 서문에도 편액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었다. 그리고 두 성문의 편액을 쓴 사람은 최종기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본래 필법이 정묘하고 식견이 넓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물론 광주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동문과 서문의 편액을 썼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이 일을 한 시기나 쓰게 된 과정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최종기는 1700년대 전반에 태어나 1800년대 초반에 작고했다고 하니 그 어간 어느 쯤엔가 편액을 썼을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참고로 최종기는 살아생전에 광주고을의 재정운영에 공이 컸고 음사로나마 무관직인 중군을 제수 받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옛 동문 터 근처에 있는 은암미술관의 채종기 관장은 개인적으로 동문에 꽤 관심이 높다. 늘 필자만 보면, 동문 근처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하자고 하는데 그 말이 나온 지 언뜻 두 해째가 되는가 싶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4년 3월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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