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 무대읽기] 연극 ‘세 자매’
애매한 아방가르드 실험극…차기작 주목
제37회 광주연극제가 ‘빛고을 시민문화회관’에서 지난 3일부터 시작됐다. 첫 무대는 극단 시민의 ‘세 자매’였다. ‘세 자매’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의 작품이다. 2019년 말에 광주시립극단도 제14회 정기 공연으로 올린 바 있는 바로 그 작품이다.
체호프는 연극사에서 사실주의극의 맥에 위치한 작가인데, ‘갈매기’, ‘벚꽃 동산’, ‘바냐 아저씨’ 그리고 ‘세 자매’가 그의 대표작이다. 체호프의 네 작품 모두에 공통되는 점이 있다면,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지루한 일상에 지쳐서 뭔가가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세 자매’에는 그러한 인물로 올가, 마샤, 이리나, 그리고 안드레이가 나온다.
이 인물들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삶을 꿈꾼다. 예를 들면 이 네 남매는 어렸을 적 살았던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지금 사는 변방의 소도시에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온 것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그곳을 떠나 모스크바로 가지 못한다.
왜 못 가는 것일까? 물론 사람이 삶의 터전을 갑자기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모스크바를 그리워하고 동경하면서 그들 네 남매는 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까?
지루한 일상, 지금 이곳에 대한 불만, 다른 곳, 다른 삶에 대한 동경 등으로 어둡고 우울한 색이 강하게 느껴지는 희곡이 ‘세 자매’다. 그런데 정작 체호프는 이 작품이 너무 진지하게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랐다고 한다.(다음 백과, 안톤 체호프 참조) 극단 ‘시민’은 이러한 원작자의 뜻을 반영한 작품을 만들기로 한 것 같았다.
장원 연출은 보통 인터미션을 두고 긴 시간 공연해야 하는 작품을 90분 정도로 잘라냈고, 무대에는 어떤 장치도 없었다. 바둑판처럼 선이 그어져 있는 바닥에 거의 시종일관 서서 대사를 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연출의 마리오네트들처럼 느꼈다.
특히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특유의 몸짓(춤이라고 해야 하나?)을 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그들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중에는 운명이라는 실에 묶여 허둥거리는 인간을 상징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지하게 대사를 하다가도 갑자기 춤추듯이 우쭐거리며 한껏 흥겹게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은 더 강해졌다. 또 한 가지 특이했던 것은 내레이션이었다. 연극은 대사와 지문에 의한 행동, 이 두 가지 것을 무대에서 배우가 신체를 사용하여 내용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이다.
그런데 극단 시민은 ‘이리나는 당황한다’, ‘나타샤가 등장한다’와 같은 나레이션을 배우가 한다. 그냥 등장하면 관객이 모를까 봐 그랬을까? 당황했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을 연기로 전달하는 것보다 한번 말로 하면 뭔가가 더 있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배우들은 우쭐거리며 춤을 추듯이 등장하고 퇴장하고, 자기가 맡은 역에 맞는 감정으로 대사하고, 지문을 읊고, 진짜 춤도 추는 등 여러 가지 것을 보여준다. 연출의 의도에 따라 작품을 만든 배우들이 무척 수고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지점이었다.
연출은 체호프를 해체하고 전위극을 만들고 싶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장 큰 특징은 연극이 끝난 후, 커튼콜 없이 세 자매가 서로 붙어 한 덩어리로 서서 마지막 관객이 나갈 때까지 서 있는 점이다. 그 유명한 올가의 대사(우리는 살아내야 해, 우리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어. 굳세게 살아가자.)가 비장하게 울려 퍼지는 동안 큰 언니 올가 양옆에 선 마샤와 이리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극단 시민의 ‘세 자매’는 애매했다. 원래 아방가르드, 실험극이란 게 그렇다. 몹시 애매하다. 흔히 생각하는 연극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나름대로는 신선한 문화적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극단 ‘시민’의 다음 행로를 주의 깊게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광주 연극판에서 보기 힘든 새로운 연극을 그들이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