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광주가 낳은 ‘복합문화상영관’
1927년 초엽 광주에는 광남관(光南館)이란 극장이 등장한다. 당시 광주에는 극장이라 할 만한 것이 광남관 외에 하나 더 있었다. 황금동 런던약국 사거리(요즘에는 메가시티박스 사거리) 근처 파레스호텔 자리에 있던 광주좌(光州座)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1916년께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광주좌는 처음부터 영화 상영을 위한 목적한 곳이라기보다는 연주회·연극 등 공연장 성격이 강했다. 1920년대 광주권번의 전신인 광산기생조합 등이 1년에 한 두 번씩 온습회(溫習會·지금의 발표회와 비슷)라는 이름으로 광주좌에서 공연을 열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반면에 광남관은 애초부터 영화 상영을 염두에 두고 지어진 건물이었다. 극장은 당시 광주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들이 구로세(黑瀨)를 대표로 하여 조합 형태로 착공했는데 나중에는 구로세의 단독 극장주 체제로 바뀌었다.
최승희 무용 광주 공연도 광남관서
광남관의 건물 내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계상(階上)과 계하(階下)로 나눠 입장료를 따로 받았던 것을 보면 2층 구조였던 것 같다. 또 1930년대 무성영화를 기준으로 계상이 20전, 계하가 10전으로 계상이 두 배나 비싼 것으로 보아 2층에 발코니를 두고 이곳을 상등석으로 여기는 관행이 이때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광남관은 영화상영관으로 지은 탓에 처음부터 전속 영사기사를 두고 있었다. 조명덕(趙明德)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1928년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삼우회(三友會) 혹은 광주영화사라는 단체를 조직해 일종의 영화제를 개최했다. 또한 이들은 조선인 경영의 극장 설립을 계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인 경영의 극장은 1934년 충장로3가에서 남해당(악기점)을 경영하는 김준실에 의해 재차 시도됐다가 1935년 최선진(지주이자 정미업자로 훗날 유은학원 설립함)에 의해 결실을 맺기 전까지 사뭇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광남관 그리고 1930년 후반기에 새로 이름을 바꿔 제국관(帝國館)이 된 이 극장은 전적으로 영화만 상영했던 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수많은 공연과 행사들이 열렸는데 20세기 초엽 한국 현대무용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최승희(崔承喜)와 조택원(趙澤元)의 광주공연이 열린 곳도 바로 이 극장에서였다. 최승희의 광주공연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증언자과 기록에 따라 다소 이견이 있다. 1930년대 동아일보에는 1931년에 제국관에서 공연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1936년에도 공연했다고 하는데 이때는 공연장소가 광주극장이었다고 한다.
이 광주극장 공연 때는 당시 광주농고에 재학 중이던 정준채(鄭準采)가 변장을 하고 들어가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들켜 정학처분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정준채는 사직공원 입구 양파정을 세운 정낙교의 외손자로 나중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영화감독이 됐는데 음악가 정추가 그의 친동생이다.
조택원도 1934년과 35년에 광주공연을 했는데 1935년 공연 때는 분명 제국관을 이용했던 것 같다. 이밖에도 최승희와 조택원의 무용선생인 이시이 바쿠(石井漠)도 광주에서 1926년과 1942년에 광주공연을 했다는데 1993년판 ‘광주시사’제2권에 따르면 이시이의 1926년 공연 장소는 광남관이었다고 한다.
적산 불하받아 공화극장-동방극장…
무용 외에도 다채로운 공연행사들이 이곳 광남관 또는 제국관에서 펼쳐졌다. 1933년 컬럼비아 레코드의 전속가수인 채규엽이 남해당 김준실의 초청으로 이곳에서 공연했고, 1935년에는 역시 남해당 주최로 오케 레코드의 전속 만담가 신불출과 가수 이난영, 국악인 임방울과 신일선 등이 이 극장에서 공연했다. 또 1935년 10월에는 광주YMCA가 당시 한창 이름을 날리던 권투선수 황을수를 초청해 제국관에서 환영회 겸 시범경기를 열었던 일도 있었다.
이처럼 영화 외에도 수많은 공연과 행사가 열렸던 광남관은 해방과 함께 구로세가 일본으로 돌아감에 따라 주인 없는 적산으로 남게 됐다. 이에 제국관 시절에 영사기사를 지냈던 연고로 전기섭이 불하를 받아 공화극장(共和劇場)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영업을 했는데 중도에 다시 동방극장(東方劇場)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이후에도 극장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다. 자유당 시절에 동방극장은 전기섭에서 당시 국회의원이던 구흥남에게 넘어 갔고 다시 광주일보의 창립자인 언론인 김남중의 손에 얼마간 있다가 이후 오권수가 경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는 상호를 다시 동방극장에서 무등극장으로 바꿨다. 이처럼 숱하게 극장주와 상호가 바뀌었지만 광남관, 다시 말해 무등극장은 오랫동안 광주에서 대중문화의 싹을 피어올리는 중요한 활동무대였다. 하지만 결국 극장은 2000년대 들어 복합상영관들의 기세에 밀려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고 2012년에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4년 7월 작성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