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서점, 경찰서, 그리고 누각

일제강점기 초반의 광주경찰서. 지금의 충장서림 일대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반의 광주경찰서. 지금의 충장서림 일대에 있었다.

 한 장소가 세대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예는 아주 많다. 우체국 앞 사거리도 그런 곳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충장로1가와 2가가 만나는 교차점은 ‘우체국 앞 사거리’였다. 그런데 몇해 전 우체국이 영업실만 남기고 대인동 동부소방서 맞은편으로 이사를 감에 따라 이제 더 이상 그곳을 우체국 앞 사거리라 부르기엔 머쓱해졌다. 아마도 한 세대가 지날 즈음에는 그 근처에 우체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게 될지 모른다.

 시간은 장소를, 기억을 바꾼다

 그래도 그 네거리를 ‘우다방’이라 불렀던 사실을 토대로 그 말의 뿌리를 찾다보면 충장로2가가 막 시작하는 모퉁이에 아주 오래전 우체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 때쯤, 2014년 8월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세월호 특별법의 제정을 호소하는 청년들의 쉰 목소리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기억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 옛 우체국에서 금남로 쪽으로 몇 발자국을 가다보면, 비록 지하에나마 충장로의 이름을 딴 서점이 있고 그 옆에는 유명 브랜드의 커피전문점이 있다. 오늘날 이곳을 소개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외의 다른 것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장소가 다른 이들에게는 다른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1929년 학생들의 항일시위가 광주 시내를 휩쓸 때 이곳은 경찰서 자리였다. 그 10년 전 역시 독립을 염원하는 시위대가 시내를 돌 때에도 이곳은 경찰서였다. 그러나 1919년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작고한 지 오래고, 1929년을 어제 일처럼 말할 수 있는 분들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에 경찰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많은 이들이 식민지 광주의 현실에 저항하다가 그곳 유치장에 갇히고 심문을 받아야 했던 것도 분명한 진실이다.

 1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그런데 가끔 궁금하다. 1930년대 지금의 대의동 동부경찰서 자리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 경찰서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가 이 땅의 아무데나 깃발만 꽂으면 관공서가 되고 경찰서가 됐기 때문일까?

 지난 주 광주의 한 원로분과 충장로의 옛 자취를 찾아 답사를 했을 때 한 동행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야. 과거에 서점이던 곳은 지금도 서점이고, 과거에 빵집이던 자리는 지금도 빵을 팔고 있으니. 마치 땅에 DNA가 있는 듯 10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같은 곳에 비슷한 가게가 있으니 말이야.”

 그렇다. 묘하게 충장로에는 어떤 힘에 이끌려 한 장소가 다음 몇 세대가 흐른 뒤에도 같거나 비슷한 장소로 사용되는 사례가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의 경찰서도 그 어떤 힘에 의해 경찰서가 된 것은 아닐까?

 금남로1가 35번지는 경찰서 자리의 옛 주소다. 이곳에 경찰서가 들어선 것은 일제가 강점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당시는 대한제국시절이었는데 말이 제국이지 제국은 누추한 이름뿐이었다. 경찰서도 일제의 경찰서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저들이 이곳을 경찰서로 삼기 전에 이곳엔 훈련청(訓練廳)이 있었다. 아마도 군졸들이 군사훈련을 연마하던 장소였지 않나 싶다. 그런데 훈련청 전에는 같은 장소에 연무청(鍊武廳)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 이름으로 봐서는 훈련청과 비슷한 기능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뭐가 있었을까?

 끝까지 쫓아 비로소 알게 되는 사실

 1910년대에 광주 시내를 그린 옛 지도 하나가 지금 국가기록원에 있다. 이 지도에 옛 경찰서 자리를 보면 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이 일대는 원래 서문리(西門里)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경찰서 일대만 유독 사정리(射亭里)에 속했다. 사정리는 지금의 금남로 일대를 넘어 궁동(弓洞)의 일부까지 퍼져 있었다. 요컨대 이곳은 아주 오래전 활터의 일부였고 그 활터에 딸린 집, 즉 습사소(習射所)가 있었으니 그것을 관덕정(館德亭)이라 했다. 여하튼 이 활터 구역의 일부가 훗날 궁동의 불렸던 것은 분명하다. (일부에서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궁수(弓樹)라는 유명한 나무가 있어 궁동이라 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사실 궁수가 있던 동네, 즉 궁수리는 지금의 금동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관덕정은 이전에 희경루(喜慶樓)라 불렸다. 물론 조선 후기까지 이곳에 희경루란 2층 누각이 있었단 얘기는 아니다. 희경루에 대한 기록은 17세기 이후 종적을 감춘다. 하지만 습사소의 형태는 달랐을지언정 희경루 자리에 관덕정이 들어섰던 것 같고 그런 이유로 주변이 온통 서문리에 속했음에도 유독 그 자리만은 따로 사정리라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자, 이렇게 보면 우리가 옛 경찰서 자리를 일제강점기의 흔적으로 기억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에서 기념할 장소가 된다. 비록 이것이 충장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지언정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시작하지 않던가?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4년 8월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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