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1941년 충장로

충장로1가(1941년).
충장로1가(1941년).

 사진에 담긴 곳은 광주 충장로1가이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 당시 본정(本町) 1정목(丁目)이라 부르던 거리였다. 그래서 길의 좌우편으로 늘어선 가게들의 간판들 가운데 ‘도리도’라는 한글을 빼면 온통 일본색이다.

 왼편의 맨 앞은 지금의 충장로1가 31번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당시 일본 옷을 팔던 미야마치(宮道) 오복점(吳服店)이고 그 옆은 모리다(森田) 약국이다. 도리도는 이 집에서 팔던 성병 치료제였고 그 집에서 취급하던 상품 중에 진탄, 즉 인단(仁丹)이란 가루치약도 있었음을 작은 돌출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신서(新書) 태합기(太閤記)’란 소설의 입점을 알리는 깃발이 내걸린 집은 기쿠치(菊地) 이치니토(一二堂) 서점이다. 충장로1가 30번지에 있었던 이 서점 자리는 훗날 삼복서점이 들어선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이때는 일본인 사카키바라가 책을 팔고 있었지만 말이다.

 서점 뒤편으로 보이는 2층 벽돌건물은 지금의 조선대학교 동창회관 건물이 들어선 지점이거나 그 근처다. 당시에는 와타베(渡部) 양복점이 있었다. 일제 초엽부터 문을 열었던 이곳은 이후에 수많은 도제들이 드나들며 양복 짓는 기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이 사진을 찍을 무렵까지도 주인 와타베는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음악다방 있고, 안경점에는 안경그림이

 한편 오른편에도 일본어 간판들이 연달아 이어져있다. 맨 앞쪽에 ‘빙과자’란 한자가 보이고 그 옆의 글자가 조금 잘린 간판은 아이스크림을 가타가나로 적은 듯하다.

 그 옆에는 광주음다옥(光州音茶屋)이 보이는데 아마도 건물 2층에 있었던 음악다방이었던 모양이다. 이 집은 콜롬비아 회사에서 발행한 음반들을 틀어놓고 장사를 했다. 앞길에는 당시 막 개봉한 영화 ‘힘차게 가자’의 주제곡을 담은 음반이 가게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가구를 만들어 팔던 히라미(平見)의 야마가와(山川) 상점 등도 보인다.

 하지만 간판들이 비스듬하게 사진에 담긴 탓에 모두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안경테를 그려 넣은 돌출간판이 있는 곳이 나카가와(中川)란 자가 운영하던 모리(森) 안경점이라는 사실만은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다.

 그 해 ‘여름’을 알 수 있는 전경들

 사진은 언제쯤의 충장로를 담은 것일까? 반소매 상의에 반바지 차림이 많고, 한쪽에는 하얀 모시로 지은 한복을 입은 여인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여름날이 확실하다. 그리고 상점 앞에 놓인 간판들은 통해 이 여름이 어느 해인지도 가늠할 수 있다.

 광주음다옥의 입간판이 소개한 영화는 1941년에 처음 개봉됐다.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쇼쿠치(松竹)가 제작했고 30년대 후반부터 일본 멜로영화의 거장으로 주목받던 노무라 히로마사(野村浩將)가 감독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그 해 5월부터 상영됐다는 기록이 있다.

 1941년이란 해는 그 맞은편 서점이 내건 깃발에서도 확인된다. 기쿠치 서점 앞의 깃발에 보이는 ‘신서 태합기’가 출간된 해 역시 41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작가는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이다. 우리가 최근까지 읽은 대부분의 삼국지가 대개 이 사람이 각색한 것을 본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태합기는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인데 출간 당시가 일제의 중국본토 침공이 한창이던 시기라 단순한 소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요시가와는 중국 침략과 태평양전쟁 당시에 온갖 학살과 만행을 일삼던 쯔지(?)란 일본군 장교가 패전 후에 도피생활을 할 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일제의 끝자락, 가로등이 꺼지다

 물론 이 사진 속에서 태평양전쟁, 그리고 일제 패망의 그늘이 드리워있지는 않다. 적성국 언어라는 이유로 곧 사라질 콜롬비아란 영어도 아직은 간판에 보이고 가로등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해 12월, 일제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급습하고 비로소 분위기는 바뀐다.

 이 사진으로부터 1년 뒤인 1942년 여름, 태평양의 외딴 섬 미드웨이에서 큰 해전이 일어나고 닷새쯤 지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충장로의 가로등은 1938년부터 등화관제란 이유로 점등을 멈추더니 바로 42년 여름을 지나 아예 철거되어 다시 고철로 녹여져 일본으로 향했다. 일제의 끝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4년 11월 최초 작성됐습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