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 터무니를 찾아서]우주항공산업 전략단지 고흥
고흥의 관문에서 나는 늘 도로 표지판에 ‘무인의 도시’라고 쓰여져 있음에 놀라곤 한다. 어떻게 한 도시의 정체성을 밝히는 표식에 ‘무인’이라는 삼엄한 말을 가져다 놓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고흥반도 안으로 발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표지판은 언제나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쑤였다.
이번에는 아예 출발할 때부터 그 표지판의 사진을 찍자고 마음먹고 그곳에 이르렀다. ‘무인의 고장 임진왜란 호국성지’로 타이틀을 시작해 이순신 장군의 초임지와 해전성지로 갈래를 나눠 발포만호성 일원과 녹도진 일대를 나열해 두었다.
해상 전투의 핵심지
아무래도 고흥군의 입장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고흥이 전라좌수영의 핵심지역으로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수영의 본진인 여수에게 관심이 집중된 것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것 아닌가 생각됐다.
전라 좌수영에는 5관 5포가 있었다. 즉 행정구역인 순천, 광양, 낙안, 흥양, 보성과 국토방위의 최일선 수군이 주둔하는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이 고흥의 옛 이름인 흥양현에 있었고, 방답진은 순천 도호부 오늘날 여수 돌산에 속해 있었다. 하니 수군의 주력 부대가 대부분 고흥에 주둔하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배를 건조하고, 무기를 제조하고, 농사를 통해 식량을 조달했으며 해상 전투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당시 전몰한 병사의 수효를 보더라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 공훈에도 고흥은 늘 가장자리였다. 좌수영의 본영이 고흥에 있지 않은 탓이기도 하고, 싸움의 일선에 선 장졸들의 출신이 평민이 주력을 이뤘기 때문이다. 애써 표지판을 찍어야 하는 내 마음에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의 한 켠이라도 곁을 내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표지판을 담아내는 내 마음이 한결 개운해진다. 벌써 고흥을 수없이 지나왔는데 차창 너머로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다 마침내 밀린 숙제를 해치우듯이 찍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가뿐하게 고흥 읍내로 들어섰다. 이번 길은 고흥 역사를 연구해 온 고흥분을 만나는 자리다. 점심을 서둘러 마치고 약속한 공간으로 찾아갔다. 농업 일을 하면서 거기에서 나온 수익을 지역사 연구에 투여하며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늘상 현장 답사와 서지 연구에 몰입해 왔다는 그분과의 대화는 초면임에도 막힘없이 진행된다.
갓 태어난 아이의 눈망울처럼
지역을 바라보는 눈이 애정으로 가득하지만 편견없이 마치 갓 태어난 아이의 눈망울처럼 대하려는 태도가 너무나 고맙게 느껴진다.
고흥역사의 편린을 들춰내려는 내 질문은 이랬다. 옛 지명중 ‘고이부곡’이 나오는데 이는 어떤 맥락을 가질까요? 라는 것에 선생님은 “고흥에서는 고양이를 괭이, 고이라고 부러거든요. 그래서 고양이가 많은가 아니면 지형이 고양이를 닮은 곳이 없나 문헌과 현장을 뒤져 보지만 그런 것이 없어요. 묘하게 우리 지역의 형성과정을 보면 바다가 삼면인 반도지형이라는 점에서 바다 밖으로부터의 이주 세력이 있을 지역인데 중국의 묘족이 이쪽으로 들어온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비정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들이 중국내에서의 입지로 인해 강과 바다를 따라 들어오며 그들의 종족 표상인 묘족이란 것을 각인하기 위해 묘곡, 즉 고양이 부곡이 되지 않았나 라는 상상입니다. 실제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는 남방계와 북방계 사이의 혼종된 문화양상들이 많이 드러나거든요.”
사실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 셈이었다.
놀라운 상상이었지만 강하게 부인하거나 긍정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말씀의 끝자락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오는 이야기 즉, 구술문자에는 수많은 무늬들이 침잠되어 있다.
한가지의 일을 놓고도 그것을 바라보고 새기는 갈래들이 천차만별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말과 말로 이어지는 삶이 기록화 되는 문자문화로 이행되면서 구술의 상상력과 더께는 생략되기 시작했고 문자라는 좁은 상상의 감옥에 인류가 포섭되어 버린 것은 기실 슬픈 일이다.
원고지의 시대에서 워드프로세서의 시대로 진화해 왔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것이 더 답답하게 우리의 삶을 옥죄는 문자 지옥으로 인도하지 않았나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 고흥에서의 이런 만남이 결국 아직 서술되지 않은 고흥사의 수수께끼를 찾아가는 역사학자이자 탐험가를 알현하는 듯한 기시감으로 이어졌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인의 도시라는 브랜딩이 고흥이 가진 정체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는 그분의 언질을 들었다. 그래 억울하고 아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다른 역사들도 함께 병존하는데 왜 입만 열만 임진왜란의 고흥만 되돌이표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쉽다는 이야기에 문득 나마저 공감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만남의 시간은 예기치 않은 죽비로 다가왔고, 이제 축사로 가셔야 한다는 말씀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고흥의 속살을 찾아 길 위에 올랐다. 고흥읍내에서 과거 KT&G 건물을 문화거점으로 리모델링 한 공간을 방문했다. 지방소멸, 인구감소, 초고령화 등이 화두인 상황에서 소멸위험군에 드는 지역들의 고군분투는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다.
불가사의 집합체 고흥향우회 내력
국가의 우주항공산업의 전략단지라고 하지만 고흥은 과거 20만 명이 넘는 인구들이 거주했던 호남의 인구밀집 지역중의 하나였다.
뜨락이 넓지도 않았고, 수자원이 풍성하지 않았지만 밭자락과 바다를 일구며 성실하게 삶을 살아왔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근근이 사는 것이 비티기 힘들어 이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저마다 살 곳을 찾아 타관으로 떠나 그곳을 고향 삼아 정착한 이들은 이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고향에서 제 부모들이 해왔던 동년배들이 한데 모여 계 모임을 통해 상호협력하는 갑계를 향우회로 변용하여 똘똘 뭉쳐 서로를 응원하고 성공의 길로 끌어주는 문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불가사의한 집합체라 하는 해병대전우회, 고대동문회, 호남향우회 보다 더 견고한 것이 고흥 향우회라는 신화를 만든 것이다.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는 법이다. 어쩌면 고흥이 한 국가의 도시이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향이나 소나 부곡같은 최소단위의 마을로 고려말기까지 이어왔다는 것은 고흥인들에게는 한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여느 지역보다 견고한 그들만의 공동체 문화를 간직한 것이고, 그런 끝단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갑계‘라는 모임이다.
아까 만났던 선생님이 갑계의 가장 큰 강점으로 동년배 사이의 이 모임에는 계급도, 신분도, 빈부의 격차도 다 해소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었다. 도시화, 산업화가 되면서 이런 갑장들의 문화가 훗날 세대에게는 전설처럼 느껴지지만 고흥내부에는 아직 짱짱하게 이런 갑계 모임이 존속되는 것이다.
하여튼 유휴공간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전국의 다양한 사례가 있는데, 고흥은 지붕없는 박물관이라는 자랑처럼 갤러리 중심의 공간으로 새로운 창작과 교류의 산실을 만들었다는데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다시 차를 몰아 바닷가를 향한다. 최종 목적지는 남열해수욕장이다.
해창만 너른 뜨락을 지나며
가는 길 해창만의 너른 뜨락을 만났다.
바다를 간척하여 비로소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상전벽해를 만들어낸 곳이다. 생태적 관점에서 갯벌의 중요성을 수없이 되뇌이지만 고흥의 지리적 공간과 삶의 궤적에서는 이 말이 사치로 들릴 수밖에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해창만 지나 해변길을 달리는데 바람 마저도 달달하게 느껴진다. 문득 도로 표지판에 사도진이라는 표식이 나온다. 5관5포중의 하나인 사도인데 그 도자가 섬 도(島)자가 아니라 건널 도(渡)자로 쓰여져 있다. 헉, 그간 사도를 섬으로 알았던 것이 이상하다. 차를 사도 방향으로 몰았다.
갯벌에서 공동작업을 하시는 마을 분들의 모습이 보인다. 황금어장에 황금알을 낳는 뻘을 가진 지역민들이 물빠진 시간대에 모여 함께 뻘일을 하는 정경이 아름답기도 하고 고되 보이기도 한다.
잠시 멈추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작년 고흥 우도에서 한 할머니의 뻘 일을 바라보며 “게도, 고동도, 바지락도, 낙지도, 갈매기도, 잔잔한 파도와 석양까지 아우성인 것을 실경예술”이라고 칭한 광주문화재단 황풍년 대표의 칼럼이 스쳐 지나간다.
다시 사도진, 역시 뱀처럼 생긴 지형에 붙은 이름이었고, 그 앞에 섬이 개구리 형상의 섬이어서 뱀이 개구리를 잡으러 물을 넘어가는 지명유래를 가지고 있었다. 수군진의 흔적이 거의 멸실되어 있지만 지형자체가 은폐와 엄폐가 잘 되어 있고 배가 정박하기에 알맞은 것이 육안으로도 확연히 드러나는 곳이었다. 육지로 올라와 있는 목선 한척이 희미한 옛 모습을 상기하게 하는 광경을 뒤로하고 남열로 향했다.
나로도의 우주발사대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전망대가 있고 바다에는 파도가 넘실대고 있다. 남해안에 가장 파도가 좋아 서퍼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는 명성처럼 아직 바닷물이 차가운데 십여명의 서퍼들이 파도를 즐기고 있다.
곱디 고운 모래밭에서 하늘을 향한 우주 발사대 모형의 전망대와 바다를 유영하는 서퍼들이 모두 한통속으로 느껴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내내 눈길을 던져 주었다. 언젠가 고흥에서 나도 저들처럼 서핑을 즐길 날이 곧 다가올 것 같았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