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다윈이 헨슬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다윈이 5년 간 항해했던 배 ‘비글호’.
다윈이 5년 간 항해했던 배 ‘비글호’.

 서재를 정리하다 우연히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오래 전 사두고 읽지 않아 이제는 누렇게 변해 버린 책의 제목은 ‘찰스 다윈: 인간 다윈과 다위니즘’으로 1988년에 민음사에서 출간된 책이었다.

 정용재 교수님은 두 대학에서 40년 이상 생물학을 강의해온 교수로 정년을 앞두고 또 때마침 다윈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책을 저술했다고 머리말에 쓰고 있었다.

 몇 줄을 더 읽어 내려가니 “처음에는 헨슬로(Henslow)가 있는 곳에 반드시 다윈이 그림자처럼 있었는데, 나중에는 다윈이 있는 곳에 반드시 헨슬로가 있다”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라는 구절이 나왔다. 무슨 말인지 궁금해져서 그 자리에 그냥 쭈그리고 앉아 단숨에 책을 읽게 되었다.

 책에는 다윈의 어린 시절과 헨슬로 교수를 만나게 된 사연, 그리고 그를 만나 다윈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잘 정리돼 있었다.

 다윈은 1809년에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호기심이 많았으며 동물을 사랑했다. 그는 특히 우리 세대 대부분이 어렸을 적에 한두 번쯤 실천하다 그만두었을 법한 우표 수집(collecting) 같은 것에 특히나 열심이었다. 그는 새알, 곤충, 조개껍데기, 광석, 우표, 동전 등 모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모았으며 시간 날 때마다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것을 좋아하던 다윈에게 틀에 박힌 학교 생활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고 실제로 그는 대학을 두 개나 옮겨 다니면서도 적응하지 못해 거의 실패할 뻔했다.

 처음에는 의사인 아버지의 권유로 에딘버러 의과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마취제 없이 수술해야만 하는 환자들이 내지르는 고통 소리를 듣다 못해 뛰쳐나와 버렸고, 다시 재수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신학과에 입학했지만 흥미를 갖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다윈이 아버지가 비글호 탐험을 반대하자 반대하는 이유를 정리한 리스트.
다윈이 아버지가 비글호 탐험을 반대하자 반대하는 이유를 정리한 리스트.

 아무리 하찮고 한심한 질문에도 답하다

 그런 다윈이 딱 하나 관심을 두고 좋아하던 과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헨슬로 교수가 하던 식물학 강의였다.

 그는 다윈이 아무리 하찮고 한심한 질문을 해도 쓸데없다고 비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친절하게 답해주었고, 식물 채집도 같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헨슬로 교수는 방황하던 20대 청년 다윈에게 식물학과 지질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으며 나중에 비글호에 동행하여 남아메리카 탐험에 도전해보라는 편지도 친절하게 보내주었다. 그런 그를 믿고 따르던 다윈은 “헨슬로 교수야말로 정말 위대한 리더이며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한 편지에 쓰고 있다.

 그런데 만약에 다윈이 헨슬로 교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다윈이 비글호의 오랜 탐험 후에 자연선택이라는 진화론을 주창하며 19세기 생물학의 혁신 아이콘이 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진화론의 주창자는 다윈보다는 젊은 청년 월러스에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다윈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또 그 재능을 발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고 격려해준 헨슬로 교수의 트리거링(trigering: 방아쇠 당기기)역할이 있었기에 역사는 다윈 쪽으로 기울어졌을 것이다.

 책의 저자가 다윈과 인연이 깊듯이 우리나라 과학의 날 역시 다윈과 연관이 깊다.

 1967년 과학기술처가 출범한 이해 우리나라 과학의 날은 4월 21일로 지정되어 기념해오고 있지만 원래 과학의 날은 4월 19일이었다. 이 날은 바로 다윈이 세상을 떠난 날이고, 다윈 사후 50주년을 기념한 해에 제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용관 선생은 일본의 근대화가 과학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하고 지식인 100여 명과 함께 과학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에 발명학회를 조직한 그는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였으며 “과학의 생활화, 생활의 과학화”라는 슬로건 아래 과학기술의 발전과 과학 마인드의 확산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했다.

 ‘과학 조선’이라는 최초의 과학잡지도 발간하고, 자동차 54대를 동원하여 거리행진을 하면서 홍난파 작곡의 “과학의 노래”까지도 연주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안타깝게 1938년 이후 중단되고 말았다.

 청소년 잠재력 발휘할 수 있는 트리거링을…

 4월 19일을 최초의 과학의 날로 정한 이유는 당시 다윈이 가장 유명한 과학자였다는 이유, 또 만물이 꽃을 피우는 봄이라는 시절의 특성 때문이었겠지만, 필자는 다윈이 과학의 날 가치에 가장 부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매년 과학의 날을 기념하면서 다양한 과학체험 이벤트를 마련하고, 또 국가 차원의 대규모 축제를 기획하거나 각종 미디어를 활용한 과학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는 이유는 보다 많은 청소년들을 과학 분야로 안내하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자신들로 모르는 내재된 과학적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나아가 발견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길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다윈의 성장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던 헨슬로 교수의 트리거링 역할 때문인 것이다.

 올해로 과학의 날이 56회를 맞이했다. 전국에서는 많은 행사가 열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접했을 것이다. 과학의 날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장점을 알아봐주고 격려해주는 트리거링이 더 많이 일어났기를 기대해보면서 이제는 트리거링이 우리 모두의 문화로 정착되기를 기원해본다.

 조숙경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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