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한량 모였으되 ‘덕’을 응시코저

광주우체국. 2007년 촬영. 광주드림 자료사진.

 조선시대에 활쏘기는 향사례라 해서 향음례와 함께 지방교화의 한 방편이었다. 지방관은 1년에 두 차례, 삼월 삼짇날과 구월 중양절쯤에 지역 양반들을 불러 모아놓고 주연을 베푼 뒤에 활쏘기 시합을 펼쳤다. 이런 행사의 주 무대가 관덕정이었다.

 활터의 기원, 광주 곳곳으로 뻗어가

 오늘날 광주에 관덕정은 사직공원 내 활터 안에 있다. 하지만 이 관덕정은 5·16 직후에 세운 것이다. 일제 때는 관덕정에 준하는 건물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광주공원 옆에 있었다. 한량이자 부호인 임병룡이 세운 대환정이 그것으로, 해방 후에 어느 문중에 매각돼 지금은 그 문중의 소유가 됐는데 건물은 아직 원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이외에도 남문 밖에는 남사정, 북문 밖에는 북사정이란 활터 건물이 있었다. 남사정은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근처에 있었고 북사정은 대인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남사정 만큼 명확치는 않다.

 이 모든 활터의 기원이 관덕정이고 본래는 광주읍성 안에 있었다. 그 기원은 멀리 1451년 조선 문종 원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건물은 희경루라 했다. 신숙주가 쓴 글에 따르면 희경루는 남북으로 5칸, 동서로 4칸인 2층 누각 형태였다. 동쪽으로는 큰 길과 맞닿아 있었고 서쪽에는 대숲이 있었으며 누각 북쪽엔 연못을 팠으며, 따로 동쪽에 활터를 두었다고 했다.

 이 기록 중 동쪽의 활터는 지명으로 남아 일제 초엽까지도 그 일대에는 사정리란 동네가 있었고 그 일부가 지금의 궁동이 됐다.

 광주우체국 자리에 관덕정이 있었다?

 활터의 위치는 대충 이렇다 치고, 그렇다면 희경루는 어느 쯤에 있었을까? 기록에 희경루는 1680년대부터 1750년대 사이에 관덕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자리까지 바뀌지는 않는 듯 옛 기록은 대부분 희경루처럼 관덕정이 객사 북쪽에 있었다고 적었다.

 객사는 우리가 여태껏 선행학습을 했듯 옛 무등극장 일대에 있었다. 그러니 그 북쪽, 정확히 말하자면 북문 쪽 가는 길목이 충장로 2가를 가리킨다. 그런데 충장로 2가는 4000평이 넘는 땅이다. 이 넓은 땅에서 희경루나 관덕정의 위치를 찾기는 여의치 않다.

 우선, 관덕정과 그 부지는 광주관아 소유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희경루나 그 후신인 관덕정은 광주읍지의 공해(관가 건물을 뜻하는 옛말) 항목에 넣어 기록했고, 실제 개보수 공사도 관아가 지휘감독을 했다. 그리고 훨씬 후대까지도 충장로 2가에는 광주관아의 소유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객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옛 광주우체국 자리다. 이 땅은 일제 때 소유자가 바뀌어 조선총독부 체신국 소유지가 됐다. 1913년부터 광주우체국이 들어선 뒤부터다. 그런데 우체국으로 쓰기 전에 이 땅의 소유주는 광주군이었다.

 물론 옛 읍성 내에 광주군 소유지는 이밖에도 많았고 충장로 2가에도 몇 군데 더 있었다. 하지만 우편국 자리를 관덕정으로 볼 만한 이유는 더 있었다.

1950년대 광주우체국.

 신숙주의 ‘따로 둔 활터’가 실마리

 그 중 하나는 신숙주가 쓴 글이다. 우편국 자리가 희경루라고 가정하고 그가 쓴 글을 음미하면, 그가 동쪽에 맞닿은 큰 길이라고 표현한 것은 충장로일 것이며, 누각 북쪽에 있었다는 연못은 뒷날 광주농공은행과 식산은행, 한국산업은행이 들어선 자리이자 현재 쇼핑몰 갤러리존이 있는 지점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동쪽에 따로 두었다는 활터란 옛 사정리를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여기서 신숙주가 ‘따로’라 한 것은 희경루와 활터가 큰 길, 즉 충장로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전통은 후대까지 이어져 조선후기에 우체국 자리는 서내리, 활터 자리는 사정리에 속했다.

 다른 하나는 향음례나 향사례에 참여하는 지역양반들의 회합소인 향청이 우체국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향청은 다른 말로 향사당이라 했듯 향사례와 관련이 깊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건물도 옛 기록에는 객사 북쪽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희경루 혹은 관덕정과 장소가 겹친다고 볼 수 있으나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밀하게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옛 광주학생회관 옆 골목 중간이며 충장로에서 봤을 때는 우체국 뒤편이 옛 향청 자리였다.

 과녁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참고로 조선시대에 관덕정은 활터에 딸린 건물의 일반명사처럼 사용했다. 선화당이 관찰사 집무실을 뜻하는 말로 굳어진 것과 같다. 그리고 이 관덕(觀德)이란 말은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지 못했을지라도 도구나 남의 탓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에 자신에게 허물이 있는지, 덕이 부족해서는 그런 것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보라는 의미다.

 자, 그렇다면 희경루 또는 관덕정 자리가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공간적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옛 관덕정 자리를 기억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광주우체국 앞 네거리를 우다방으로 부르는 광주 사람들에게 이곳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예전에 한량들이 활을 쥐어들고 모였듯이 요즘은 휴대전화를 쥔 젊은이들이 같은 곳에 모인다는 차이 정도나 있을까?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5년 3월 최초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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