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빛바랜 마지막 페이지를 들추다

 

 일제강점기 광주우체국 모습.
 일제강점기 광주우체국 모습.

 충장로 2가의 모퉁이를 지켜온 옛 광주우체국 본점의 내부 리모델링이 사람들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것 같다. 보도에 따르면, 옛 우체국 건물을 개조해 앞으로 커피전문점 등으로 바꿀 것이라 한다.

 100년 세월 머무는 우체국 자리

 우체국이 비록 2012년 대인동의 동부소방서 맞은편으로 이사를 갔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구청사는 광주우체국 영업과를 두고 우편업무를 봐왔다. 그래서 광주우체국이 지금도 그곳에 있다 말하기도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운 어정쩡한 상태가 이어져왔다. 어떻든 2012년 대인동으로 이전하면서 광주우체국의 충장로 시절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도 크게 그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체국이 충장로 2가에 터를 잡은 것은 1912년 12월이라고 한다. 이때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단층의 서양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이른바 화양식 건물로 우체국 청사가 완공됐다. 그리고 이것으로 따지만 우체국이 대인동의 신청사로 옮기기까지 꼬박 100년을 이곳에 머문 셈이다. 이 100년이란 세월도 그렇지만 그동안 광주우체국의 변천과정을 생각해 봐도 결코 녹록치 않는 시간이다.

 물론 우체국의 역사는 그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사람들이 광주에서 우체국의 역사가 처음부터 충장로 2가 16번지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최초 우체국은 전남대병원 맞은편

 광주에서 근대우편이 시작된 것은 1897년 3월이다. 광주우체사의 설치가 그 효시다. 그리고 광주우체사는 그해 12월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앞서 나주에 둔 우체사를 폐쇄하고 그 업무를 고스란히 광주로 옮겨온 뒤에야 우편업무를 개시했던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런데 광주우체사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충장로 2가 16번지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광주우체사는 전남대병원 맞은편, 농협은행 남광주지점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광주우체사가 이곳에서 얼마만큼 많은 일을 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한 자료에 의하면 초기 우체사 직원들은 공공서비스에 종사한다는 책무감보다는 벼락출세를 했다는 사실에 더 긍지를 느꼈다고 한다. 특히 지방 근무자들은 자신들이 지방관보다 한 등급 위인 중앙부처 관리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전에 관용문서 송달을 맡은 역리들과는 근본적으로 지위나 신분이 달랐다.

 위세등등, 우체국 직원들의 남다른 지위

 여기에 최신 우편과 전신업무를 맡고 있다는 엘리트 의식까지 보태져 그 위세가 자못 대단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일부 직원들은 지방관이나 지역주민들과 갈증을 빚는 일이 왕왕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광주우체사는 1905년 폐쇄됐다. 이 해는 러일전쟁이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끝나던 해였고 이른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제는 전쟁의 끝이 보이자 곧장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함께 통신권을 강탈했는데 그 희생물 중 하나가 광주우체사였다.

 그런데 우체사 폐쇄 직전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별도의 통신기관인 우편취급소를 운영했던 일이 있었다. 광주에도 이런 식의 일본인 우편취급소가 있었다. 1905년 일제는 이 일본인 우편취급소와 광주우체사를 하나로 묶어 ‘광주우편국’이란 새 조직을 만들다.

 출범 당시 광주우편국 청사는 충장로 2가가 아닌, 황금동에 있었다. 일본인들이 1930년대 회고한 내용을 보면 그 자리를 황금동 산다(三田) 과자점 앞이라 했다. 이곳은 옛 읍성의 서문 근처, 이른바 황금동 콜박스 사거리에서 충장로로 올라오는 길의 오른편이었다.

 우리 땅에 있으나 일본 위한 창구

 본래 이 자리엔 광주관아 소유의 창고가 있었다. 이 창고가 객사에 딸린 15칸짜리의 공수청이었는지, 아니면 8칸짜리의 누상고라는 2층 창고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창고의 소유주는 광주관아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곳에서 광주우편국은 8년을 머물렀다. 그 즈음인 1912년 12월 당시 북문통 30번지로 알려진, 지금의 충장로 2가 16번지에 화양풍의 청사를 지었고 이듬해 1월부터 우편업무를 개시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초기 광주우편국은 광주, 남평, 화순 등 세 지역의 금고금 취급을 했고 일반예금의 수신, 전신전화 사업을 병행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용자는 일본인이었다. 한국인들은 우편국을 통한 예금이 재산공개로 인식해 기피했고 우편환 이용도 같은 이유에서 꺼렸다. 전신 역시 일본인 중심이었는데 1916년 광주우편국을 거쳐 간 5만 통의 전신 중 80% 이상이 일본어로 된 것이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5년 3월 최초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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