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천년완골’ 빗돌

고창 중거리 당산.
고창 중거리 당산.

 광주 동구 학동 전남대병원 주차장 옆에는 300년쯤 되는 느티나무와 빗돌이 서 있다. 느티나무는 나이가 오래됐다는 점을 빼면 특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 없고, 빗돌 역시 여느 동네 입구에 선 입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볼품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손질을 많이 거치지 않아 자연석, 즉 완석(頑石)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돌의 한 면에는 ‘목사 신공익전 선정비(牧使申公翊全善政碑)’란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익전은 1640년대 광주목사를 지낸 인물이다. ‘광주읍지’에는 그의 재직기간만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 그가 어떤 이유로 이런 선정비를 받게 됐는지 알 수 없다.

 목사 신익전, 천년 돌에 새겨지다

 다만 그의 문집 ‘동강유집’을 보면, 광주목사로 머문 동안 광산구 신가동의 풍영정에 올라 감회를 담은 시, 법성포에 가서 세곡의 선적을 감독하면서 느낀 바를 읊은 시 등이 실려 있다. 또한 그의 행적을 적은, 짧은 일대기인 ‘행장’에 그가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군정과 환곡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선정비는 아마도 이와 관련해 세운 듯하다.

 그런데 이 빗돌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뒷면에 새겨진 글귀다. ‘천년완골(千年頑骨)’이란 네 글자가 그것이다. 이 글귀는 크기나 획이 앞의 아홉 글자보다 훨씬 크고 힘차 보인다. 게다가 자주 쓰는 글귀도 아니어서 신비감마저 준다. 특히 ‘완골’이란 어휘가 그렇다.

 천년완골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천년동안 닳지 않고 서있는 뼈다귀 같은 돌’이란 뜻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 돌이 여기에 서 있었고 그래서 고을의 역사를 응축해놓은 것과 같은 신령함을 지닌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해설을 곁붙인다 해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겐 그 의미가 여전히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냐?’고 반문하면 마땅히 더 보탤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얘기다.

 천년 버티고 서 있기를 바라며…

 그런데 이 글귀는 이곳에만 있지 않다. 광주에서 장성을 거쳐 방장산을 넘으면 모양성으로 유명한 고창 읍내가 나온다. 그리고 모양성(고창읍성)의 북문 밖에는 판소리의 중조 쯤 되는 신재효의 고택이 있고, 그 고택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걷다보면 이른바 ‘고창 중거리 당산’이 나온다.

 이 당산은 돌기둥 또는 촛대 모양인데 그 앞면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천년완골(千年頑骨) 흘연진남(屹然鎭南) 계해(癸亥) 삼월(三月) 일(日).’ 이 글귀 중 ‘계해 삼월’은 이 당산을 세운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대개 1803년 3월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천년완골 흘연진남’은 이 당산을 세운 이유를 말해주는데 대체로 “천년 동안 이곳에서 오롯이 버텨온 돌이여, 우뚝 솟아 남쪽을 지켜주소서”로 해석하는 것 같다.

 사실 이 당산이 1803년에 세워진 것이라면 돌기둥이 세워진 시간을 천년으로 표현한 것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천년완골’은 이 돌기둥이 앞으로 천년동안 이곳에 우직하게 버티고 서 있어달라는 희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잇따라 나오는 말, ‘흘연진남’은 이 돌기둥을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세운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에서 이 돌기둥을 세운 것일까? 고창 읍내에는 이와 비슷한 성격의 당산이 여럿인데 그 가운데 ‘중거리 당산’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중앙동 미륵당산’과 ‘하거리 당산’이 있다. 모두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는 점, 건립시기가 1803년임을 지시하는 글귀가 있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특정집단에 의해 건립된 것임을 암시해 준다.

 돌기둥 건립을 이끈 아전들의 노력

 그러나 정확히 1803년 고창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돌기둥을 3개씩이나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건립과 관련해 중앙동 미륵당산에는 건립과 관계된 사람 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몇 가지 정황증거가 있다.

 우선, 이들이 고창지역의 아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19세기 고을 주변에 이처럼 대규모 조형물을 세우거나 중건한 경우, 해당지역 아전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례는 다른 곳에서도 왕왕 확인된다. 전라도에서만 1830년대 익산 동고도리와 서고도리의 석불입상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50년대에는 담양 읍내리의 석당간을 다시 세웠으며 이들 과정에서 해당지역 의 아전들이 적잖은 노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해 2005년 동아대 이훈상 교수는 논문에서 고창 중앙동 미륵당산에 새겨진 이름들 가운데 은경철은 그 지역의 오랜 아전 집안출신이라 했다. 또한 시주자 이름으로 등장하는 신광득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했다.

 소문에 따르면 신광득은 신재효의 할아버지 신한빈이 아들 신광흡의 이름을 새겨달라고 주문한 것을 잘못해 신광득으로 새긴 것이라고 한다. 혹은 신광흡이 아들 신재효의 이름을 새겨 달라 한 것이 와전돼 잘못 새긴 것이라고는 주장도 있다. 이런 소문에 무게감을 주는 것은 신광흡이 1807년 고창 아전들의 집무소(질청) 건립 때 상당한 액수를 기부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황에 비춰 광주의 남문 밖 ‘천년완골’ 빗돌도 얼추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5년 4월 최초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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