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기숙하며 시험대비 ‘사마재’도

광주 사마재. 앞 대숲 위로 지붕이 나와 있는 건물이 사마재이다. 양사재처럼 지방에는 생원시와 진사시 입격자들이 문과 준비를 위해 머물 수 있도록 만든 기숙사 같은 시설이 있었다. 광주에도 이를 사마재(司馬齋) 혹은 문회재(文會齋)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광주 사마재. 앞 대숲 위로 지붕이 나와 있는 건물이 사마재이다. 양사재처럼 지방에는 생원시와 진사시 입격자들이 문과 준비를 위해 머물 수 있도록 만든 기숙사 같은 시설이 있었다. 광주에도 이를 사마재(司馬齋) 혹은 문회재(文會齋)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시험이란 말만 들어도 신경이 쭈뼛하게 서는 것은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글자를 떼기 무섭게 맞닥뜨리는 것이 시험이고 세상의 냉혹함을 처음 배우게 만드는 것도 시험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험인 과거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이란 선입견이 강하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박물관에서는 좀체 과거시험이란 주제의 전시회를 개최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험 자체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일이고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는 게 지난 몇 달 동안 필자가 경험한 바다.

 무엇보다 과거시험이 지금과 닮은 구석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오늘날 간혹 대리응시가 문제되는데 조선시대에도 이런 대리응시가 잦았던 것 같다. 선조 때는 대궐 안에서 보는 정시(庭試)에서 응시자를 따라온 하인이 답안지의 글씨를 대신 써준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임금에게 보고돼 이후 대필이 엄격하게 통제됐지만 실상은 달랐다.

 광주목사 아들 대리시험 딱 걸려

 조선시대 한문소설 중에는 영조 때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박문수가 고사장에서 대리응시와 다름없는 꼼수를 부려 과거에 급제했다는 일화를 다룬 얘기가 있다. 그런데 이 일화를 다룬 또 다른 한문소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일은 당시엔 공공연한 비밀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 같다.

 정조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광주목사가 아들의 과거시험에 사람들을 딸려 보내 답안글씨를 대신 써주게 했다. 그런데 때마침 고사장에 나온 특별점검반에 걸려 사건이 임금에게까지 보고됐다. 그런데 정조의 반응이 의외였다. 답안내용을 읊어주는 대술도 아니고 고작 글씨를 빌린 것일 뿐인데 크게 문제될 것이 무엇이냐며 이를 불문에 붙이라고 했던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대리응시가 이미 만연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대리응시에 대술이 뒤따랐던 것은 답안 작성이 그저 문자나 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답안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중요했다. 그중 하나가 대두(擡頭)다. 머리를 쳐든다는 이 말은 임금과 관계된 말을 다른 글자보다 1~2자 올려 적는 것으로 과거 답안지의 작성에도 적용됐다. 물론 매번 그렇기 힘들 때는 앞 글자와의 사이에 한 칸을 띄어 적었다.

 또한 도교나 불교 용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다. 이 원칙의 기원에 대해 ‘연려실기술’는 이런 일화를 전한다. 선조 때 선비들이 ‘장자’에 열광했다. 심지어 과거답안에 ‘장자’를 인용하기조차 했다. 그러자 임금이 나서 이를 ‘폐풍’이라 하며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선조 자신은 당시 잡스런 소설로 여긴 ‘삼국지연의’의 광팬이었다. 하루는 기대승과 ‘근사록’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삼국지연의’의 광팬인 사실이 들통이나 기대승에게 은근히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대리응시뿐 아니라 시험채점과정에서도 우리 시대와 닮은꼴이 많았다. 조선후기엔 채점과 합격여부를 가리는 과정에서 금품이 오가는 폐단까지 성행했지만 그 전에도 채점에는 뒷말이 무성했다. 그러나 양식 있는 채첨관들이 소신에 차 서로 논쟁한 경우라면 오히려 아름다웠다.

 과거 골병…머리카락 자르고 비녀 팔고

 역시 선조 때의 일이다. 진사를 뽑는 최종시험에 조희일의 부(賦)와 목대흠의 시가 장원 후보로 올랐다. 그런데 누구에게 장원을 둘 것인가를 놓고 채첨관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져 날이 저물도록 계속됐다. 결국 이 사실을 안 임금이 나서 조희일을 낙점해 장원이 됐다고 한다. 조희일과 목대흠은 1602년과 1608년에 각각 문과에도 급제했다.

 물론 이들은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에 비하면 행운아에 속한다. 조선시대 500여년을 통틀어 과거시험의 꽃이라 할 문과 급제자는 1만5000여 명이었다. 생원진사시 입격자들도 4만20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문과나 생원진사시에 들기 위해서는 악전고투를 해야 했다.

 그런데 과거준비를 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영조 때부터 순조 연간에 전북 남원과 진안에 살았던 삼의당 김 씨란 여인이 있다. 평생 남편의 입시 준비를 위해 뒷바라지를 했는데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녀를 팔아 입시생 남편의 생활비를 댔다는 대목이 보인다. 더구나 남편이 고향이 아닌 한양에 올라가 수험 준비를 하면서 그 비용이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난번 소개한 양사재처럼 지방에는 생원시와 진사시 입격자들이 문과 준비를 위해 머물 수 있도록 만든 기숙사 같은 시설이 있었다. 광주에도 이를 사마재(司馬齋) 혹은 문회재(文會齋)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이 기숙시설이 언제 처음 설립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전기부터 관련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생원진사 출신들을 위해 배려가 일찍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그 자리가 지금 광주공원에서 향교 쪽으로 올라가는 길옆의 공터다. 그리고 1990년대 광주 전남이 공동출자해 서울 대방동에 세운 남도학숙도 크게 보면 이런 사마재와 양사재에서 이어지는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5년 10월 최초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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