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작은책들]‘비가 내릴 때’ 피에르 그로츠
여러 사람을 집어삼키고 많은 도로를 물에 잠기게 한 23년의 여름 장마는 6월 하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벌써 한 달째 이어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기 전부터도 기상청은 올해 여름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고, 예측은 곧이곧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환경 문제나 기후 위기는 가장 앞서 이야기되지 않았다. 사람의 일 때문이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렸지만, 그 때문에 누군가 다치고 누군가 목숨을 잃었지만, 사람의 일이 조금 더 명확했더라면 그렇게 내리는 비에도 막을 수 있었던 사고들이 있었음을 갖가지 소식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112에 빠르게 신고된 침수 위험의 기록이 있는데도 통제되지 않은 도로, 구명조끼도 지급받지 못한 채 시민을 구출하려다 명을 달리한 군인… 비가 길게 내리는 동안 사람들은 축축한 공기만큼 답답한 현실에 탄식했다.
이러한 탄식 속에서 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책을 골랐다. 피에르 그로츠가 글을 쓰고 레미 사이아르가 그림을 그린 <비가 내릴 때>(2017, 한솔수북)는 자기 전 침대맡에서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들을 듣는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뚜렷한 색상의 선과 면으로 구성된 그림이 비가 내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듯 하다. 그 이야기에는 다양한 나라와 생명체가 등장한다.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는 물소들, 불어난 강물 아래서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물고기들과 저 멀리 떠내려가는 배 한 척. 그 모든 것들이 아이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땅이 바짝 말라 갈라지고, 식물들도 절반은 말라 있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자주 하늘을 쳐다보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거리감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이는 상상한다.
별안간 따뜻한 비가 세차게 내려요.
사람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나왔어요.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
머리와 옷이 모두 비에 젖어요.
주룩주룩
사람들이 대야와 호리병을 들고 나왔어요.
벼와 보리가 곧 땅 위로 싹을 틔울 거예요.
비가 내려요.
이제 모두에게 먹을거리가 생길 거예요.
<비가 내릴 때> 중에서.
이 모든 이야기 속에서 빗소리는 다정하고 이야기는 신기하다. 두려움에 떨거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다. 아마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하지만 그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실재가 아니다.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 속 다양한 생물들은 비를 반가워하거나 피한다. 하지만 초원의 코끼리만은 심심한 듯 무심하게 비를 맞는다. 등허리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툭툭툭 소리만 낸다.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도 역시 그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집이 있는 사람, 뿌리박을 수 있는 사람, 몸집이 큰 존재다.
그럴 수 없는 사람들 역시 정해져 있다. 주인공 아이가 편안한 빗소리를 듣는 동안 빗방울 떨어지는 박자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는, 그 아이를 그려낸 작가는 아프리카 어느 지역으로 ‘추정되는’ 피부색과 복식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물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들이 비를 반가워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기후 양극화는 그런 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달콤한 비가 반가운 만큼 퍼붓는 비는 물리적 위협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이제 ‘후진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당장 한국 곳곳에서도 하수가 범람하고 지하 주차장이 고립되었다. 얼마 전까지도 폭염에 쩍쩍 갈라지던 흙바닥은 이제 폭우에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사람이 죽었다. 이것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비가 내릴 때> 세계의 다른 구석들을 가늠해보려는 아이의 마음은 그러니까, 아주 기초적인 시작 단계다. 다정하지 않은 하늘을, 땅을, 그리고 그것을 촉발한 인간과 사람의 일을 바라보고 고심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폭우주의보 속에서 시민들을 발 벗고 나서고, 모 기업은 각종 피해복구에 구호장비와 인력을 지원했다. 텁텁한 소식들에 무릎 꿇기 전 아주 천천히, ‘우리’, ‘나’ 또한 이런 일들에 이미 휘말려 있다는 감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자.
22일부터 다시금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주말이 지나면 모두에게 다정한 해가 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이상 이것이 남의 이야기라고 믿어선 안된다는 마음으로, 여름의 마음 역시 그와 같기를 바라본다.
문의 062-954-9420.
호수 <동네책방 숨 책방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