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신안동 태봉산
조선시대의 광주를 묘사한 수십여 장의 지도들 가운데 가장 묘사력이 뛰어난 지도는 1872년에 제작된 것이다. 우리가 조선시대 광주의 모습을 그나마 대충이나마 그려볼 수 있는 데에는 이 지도의 역할이 크다. 그런데 이 지도에는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다. 지금의 북구 신안동 일대를 너른 들판으로 묘사하고 그 옆에 대야(大野)란 글자를 써넣고 그 가운데에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를 일러 ‘고려왕자태봉(高麗王子胎封)’이라 적은 부분이 그것이다.
이 글귀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안동 태봉산의 실체와 사뭇 어긋난 것이다. 우리는 이 태봉산을 1600년대 조선 16대 왕인 인조의 아들 ‘대군 아지씨’의 태를 묻은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1920년대 이 봉우리에 무덤을 써는 바람에 가뭄이 들었다고 믿은 동네 사람들이 무덤을 해치던 중에 발견한 일련의 유물 덕분에 그 실체가 명확해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50여 년 전에 그려진 지도엔 엉뚱하게도 조선왕자의 태가 아닌, 고려왕자의 태로 기록돼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조선왕자가 고려왕자로 둔갑된 까닭
이곳이 왕실가족의 태를 묻은 사실은 조선시대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1880년대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광주목중기’란 책에 그 정황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태봉산 위에는 비석 1기가 있었고 관아에서는 아전의 한 사람인 예방으로 하여금 이 비석을 관리하도록 했다. 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당시 광주사람들은 태의 실제 주인공이 정확히 누구인지까지는 몰랐다 하더라도 이곳 태봉이 왕실 가족과 관련이 깊은 인물과 연관됐다는 사실만은 분명치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 무엇을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헌종개수실록’의 1845년 기록을 보면 조선왕조는 왕실가족의 태를 묻은 곳에는 표식을 해서 농사를 짓거나 땔감을 베어내는 일을 막아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훨씬 후대이긴 하지만 1930년대 광주에 살던 일본인 야마모토 데스타로의 기록을 봐도 이 비석이 많이 마모됐으나‘천계7년’이란 글귀 정도는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천계7년은 1627년에 해당되므로 무렵 광주사람들도 이 태봉이 인조 재위연간에 묻은 태와 연관된 것임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군 아지씨’에 대한 정보 미약
하지만 1872년 광주지도엔 이런 사실이 사라지고 엉뚱하게도‘고려왕자태봉’으로 둔갑해 있었다. 이는 아마도 태의 주인공에게 일어난 변고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1828년 파묘소동으로 태봉산의 실체가 어느 정도 확인됐다고 하지만 사실 명확하게 대군 아지씨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태봉산에 관련된 전설도 이런 배경을 통해 생겨났다.
그런데 고종 때에 이르러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개수한 일이 있는데 그 결과로 나온 ‘선원속보’에 따르면 태봉산에서 발견된 지석의 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이 보인다. 태봉산 지석은 태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담은 32자의 한자들을 새긴, 검은 빛깔의 반반한 돌을 말한다. 이 지석에서 대군 아기씨는 천계4년(1624) 9월3일에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고종 때 개수한 ‘선원속보’엔 같은 시기에 인조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이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선원속보’엔 용성대군이라 한 것을 지석엔 그저 대군 아기씨라고만 적었다. 이는 태를 묻을 당시만 해도 대군이 아직 이름(대군호)을 받지 못했던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기라는 뜻으로 막역하게 대군 아지씨(大君 阿只氏)으로만 적었을 것이다(우리나라에서 어린 아이를 일컬어 ‘아지’라고 했다는 기록은 ‘고려사’ 등에도 보인다). 여하튼 이렇게 태어난 대군 아기씨, 즉 용성대군은 ‘선원속보’에 의하면 만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죽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용성대군의 태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무관심이라도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공교롭게도 이런 무관심은 지금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60년대 태봉산이 헐린 것부터 그렇지만 이 태봉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에도 약간의 무관심이 배어 있다. 오늘날 태봉산의 기억은 옛터에서 1.5km 남짓 떨어져 있는 태봉초등학교의 교명에 남아 있다. 그런데 태봉산 터에서 더 가까운 곳(500m 거리)에 있는 학교는 용봉초교이고 그보다 훨씬 멀리 위치한 학교를 태봉초교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두 학교가 개교한 시기 차이에서 비롯된 듯하다. 용봉초교는 1977년 지금의 자리인 신안동에서 개교했다. 당시 태봉산의 존재를 전혀 모를 리 없었겠지만 이미 사라진 봉우리를 기념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막 택지로 개발 중이던 동네이름을 따서 용봉초교라 했다. 반면 그보다 나중인 1991년에 태봉초교는 훨씬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태봉이란 이름을 가져다 썼다. 사실 소재지로 보자면 용봉초교는 신안초교 또는 태봉초교라 했어야 맞고 태봉초교는 용봉초교라야 맞았음에도 말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최초 작성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