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광주시외버스정류장에 내걸린 행선
아직 광주의 많은 사람들에게 대인동의 광주은행 본점 자리는 공용버스터미널로 기억된다. 1990년대 광천동으로 버스터미널이 옮기기 전, 바로 이곳에 버스터미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버스터미널이 대인동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인동 터미널이 문을 연 것은 1976년. 그전에는 광주구역(현 동부소방서) 주변과, 이 구역에서 광주대교 쪽으로 뻗은 길(구성로·일명 구역전통)을 따라 버스회사별로 정류장들이 나뉘어 있었다. 그 기간은 해방 직후부터 대인동 터미널이 들어서기까지 30여년 동안이었다. 그리고 이 30여년은 광주의 사회적 격동기와 맞물려 있다.
흔히 도시 광주의 운명을 크게 바꾼 계기로 1896년 전남도청 소재지로 광주가 선정된 사건을 꼽는다. 실제로 그 후 광주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보면 가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인구라는 측면에서 광주의 규모화는 그보다 훨씬 뒤에 일어났다.
광주 1896년 도청 소재지 선정 후 발전
현대적인 인구조사가 시작된 1920년대 중반, 전남도청 소재지 광주군에는 11만 명이 살았다. 당시 행정구역상 전남에 속한 부(府·지금의 시에 해당), 군(郡), 도(島) 가운데 5위의 규모의 인구를 보유했다.
최대 인구를 보유한 곳은 전남 인구의 10% 가까운 20만 명이 살던 제주도(濟州島)였고 육지부에서는 아직 신안군과 분리되기 전의 무안군(16만 명), 나주군(15만 명), 여수군(12만 명) 순이었으며 여수군 다음이 바로 광주군이었다. 그 무렵 광주군 인구는 전남인구의 5.5%에 불과했고 비슷한 인구규모를 자랑했던 곳으로 고흥군, 화순군, 해남군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광주의 지역 내 위상은 도청소재지 등 다른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지, 순전히 인구 비중만을 따져보면 그리 위상이 높지 않았다. 인구밀도 역시 낮아 20년대 중반 광주의 인구밀도는 이창명이 CF에서 짜장면을 배달하던 지금의 마라도보다 더 낮았다. 또 요즘의 광주는 호남 최대의 인구를 가진 도시이지만 20년대 중반엔 전주의 인구 14만 명보다 더 적었던 사실도 흥미롭다.
그런데 50년대에 이르러 광주인구는 전남인구의 10%를 차지했고 이 비율은 7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80년대에 전남인구 대비 20%대로 진입했고, 90년대에는 30%대, 2000년대에 들어서는 지금처럼 40%대에 도달했다.
이처럼 광주의 인구 집중도는 처음 얼마 동안 완만하게 증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인구는 그동안 엄청나게 증가했다. 50년대 인구 10만 명대에 머물던 광주는 60년대가 끝나갈 무렵 50만 명대에 이르러 5배나 신장했고, 70년대 말에는 70만 명대로 불었다.
광주 인구가 이처럼 30여년 동안 일곱 배로 증가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이동에 의한 것이란 사실이다. 일자리와 취학 그리고 교통과 통신의 허브 역할이 사람들을 광주로 몰려들게 했던 것이다. 동시에 전남의 빈곤도 이런 인구집중의 중요한 원인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광주 사람들 두고온 목록같은 행선지 표지
여하튼 이런저런 이유로 광주로 온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곳이 시외버스정류장이다. 물론 70년대 중반 이전까지 그들은 광주구역 주변에 회사별로 운영되던 정류장에서 광주생활의 첫발을 내딛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말이나 명절 때면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향해 일시귀향을 하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외버스정류장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사진은 이런 시외버스정류장 하나를 운영하던 금성여객의 버스 시간표다. 이 회사는 1953년에 설립돼 73년까지 운영됐다. 금성여객 정류장은 충장로5가 60번지, 현재 광주은행 중부지점 자리에 있었다. 당시 이런 시외버스 회사들은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는 후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대 후반 광주의 시외버스 연간 이용객은 이미 2000만 명이었고 70년대 후반엔 7000만 명으로 다시 껑충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버스시간표를 가득 메운 행선지들은 묘하게 당시 광주사람들이 두고 온 고향의 목록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 최초 작성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