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천년사’ 왜 문제인가?
‘전라도 천년사’는 학술지가 아니다.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학술적 연구 성과를 정리하는게 아니라 전라도와 전라도민들을 위해 전라도의 역사와 문화를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견해와 주장을 실었는데 왜 일반인들이 난리를 부리냐는 등의 언사들은 심히 적절치 못한 태도다. 전라도민들과 국민들이 이 심각한 사안에 대하여 시민단체를 만들어서 연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자신들의 뿌리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정당한 감시 활동이다.
이것을 ‘사이비 역사에 선동된 자들의 시빗거리’로 보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고 무시하는 학자들의 권위의식과 오만과 독선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비판을 하는 도민과 국민들을 대중서 작가와 인물 몇몇의 선동에 넘어가서 그런 유행을 타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연 도민들을 무엇으로 보길래 이런 글을 쓰나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전혀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독선과 오만을 보는 것 같아서 분노하면서도 오히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저런 둘러대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전라도 천년사는 동학에 대한 기술이 잘못되었느니 전라도를 단군조선의 영역에서 배제하고 고조선을 신화시하고 시간과 공간을 축소했느니 하는 많은 사실 검증해야 할 사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임나와 임나 지명들의 위치 문제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본 서기에 나온 지명 철저한 검증 필수
4세기에서 6세기 200년 간 한반도 가야땅을 일본이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론인 임나일본부설에 우리 한국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황당한 주장과 함께 지금도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임나일본부설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 실려있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자체만으로 임나일본부설의 불씨는 살아난다.
우리 역사학계는 해방이후 열심히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실제로는 이문), 침미다례, 4읍, 임나 4현 등의 위치를 모두 전라도 지역에 비정하였다. 4세기 왜가 도륙했다는 침미다례를 해남이나 강진에 비정하더니 이번 전라도천년사에는 4읍을 모두 전라북도에 비정하였다. 6세기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4현(상다리, 하다리, 모루, 사타)을 모두 전라도 여수, 순천, 광양, 돌산도 등에 비정하였다. 전라도 천년사 발간을 기회 삼아 그동안 확실히 대못박지 못했던 일본서기 지명 비정을 확고히 할 태세로 달려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명들이 정말로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것이 맞다면 역사에 비극적인 순간이라고 할지언정 사실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을 전라도 남원에 비정한 것은 근거가 전혀 없다.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오기 바란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반파를 장수군에 비정한 것 역시 전혀 근거가 없다. 일본서기에서 반파국은 일본에 대비하기 위해 성도 쌓고 봉화대도 쌓는다. 한반도의 대륙 깊숙한 곳의 장수군이 왜 일본에 대비하는가? 말이 전혀 안된다. 이를 비판하는 것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내륙의 중심에 있는 장수 지역에서 일본을 대비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반파가 장수군이라는 말인가? 전라도 천년사의 집필자는 ‘일본에 대비한다“는 내용을 문헌에서 중간 삭제라는 기묘한 방법을 이용하여 마치 없는 것처럼 해버렸다. 원문내용이 불리하다고 삭제하는게 학문적 태도인가를 묻고 싶다. 이는 공람의견으로도 제출되었으니 분명히 답해야한다. 이 6세기 기록에 나오는 반파만 보더라도 한반도에 위치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맥락상 함께 주변 지역이나 나라로 추정되는 기문, 대사 등도 마찬가지로 한반도 남부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임나 4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임나 4현을 보자. 지금 백제가 512년 할양받았다는 임나 4현이라는 하다리, 상다리, 사타, 모루라고 하는 지역을 여수, 광양, 순천, 돌산도에 비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전라도 지역 시민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목숨바쳐 지켰던 우리 여수·순천 지역인데 이를 학문하는 자들이 멋대로 비정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나라명으로 어찌보면 일본에 바치고 있는 것이다.
국내문헌에 나오지 않고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지명이나 국명을 철저히 검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지명이 한반도 남부에 붙는 순간 임나일본부설의 불씨가 활활 불타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학계는 가야의 별칭이 ‘임나’라며 가야가 임나임을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가야는 임나와 동일시할 수 없다. 역사학계의 말대로 일본서기의 사료를 엄밀하게 검토해보면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든 알 수 있다. 임나는 언제 누가 건국했는가? 이에 답해보기 바란다. 가야는 분명 김수로왕이 42년에 건국했다. 그렇다면 임나는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조에 처음으로 임나가 등장하기 때문에 최소한 BC33년 이전부터 임나가 있어왔다. 최소 7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실제 다른 문헌까지 인정된다면 기록을 보면 150년 이상의 건국연도가 차이난다. 게다가 가야는 562년에 멸망했다. 임나는 언제 멸망하였나? 임나는 562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본서기에 등장하고 있다. 임나는 계속해서 근 100년을 가야 멸망후에 더 나타난다. 이는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임나는 가야 멸망 이후에도 존재함으로 이는 일본 열도에 있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논리가 왜 사이비인지 말해보라.
왜 이런 합리적인 비판을 무시하는 것인가? 어느 일본인 학자의 말처럼 일본학계와 평생 같은 생각으로 같은 철길를 걷기로 약속했기 때문인가?
팩트·진실 기반해야 학문적 권위 세워져
국내 문헌에 전혀 없는 기문, 반파, 침미다례, 4읍, 임나4현 등을 함부로 멋대로 국내에 비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주장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연대가 늦었더라도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같은 우리 문헌을 우선으로 하여서 정리되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세계적인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에 의하면 천문학 실현율이 90퍼센트에 달한다. 일본서기의 천문학 실현율은 35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국내문헌인 삼국사기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서기는 그저 보조적으로 채워주는 수단으로 그것도 엄정하게 살펴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학계가 그러한가? 임나일본부설을 위해서 일제 관변학자 쓰다소키치와 같은 사람들이 만들었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아직도 학계에 팽배하지 않은가? 신라는 4세기 신공왕후가 침략했다는 내물왕 부터라고 해서 지금도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시민들이 1인 시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왜 아직도 삼국사기의 내용을 신뢰하지 않는가?
정말 제대로 일본서기의 내용을 보고 있지 않으면 복어의 독에 걸리고 만다. 학계는 일본서기라는 복어에서 ‘임나=가야’라는 독을 제거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첫단추부터 잘못 잠그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시민사학의 시대다.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하니 국민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있는 중국문헌, 국내문헌, 일본 문헌 모두 읽어보고 국민들이 판단하여 항의하고 비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국민들을 사이비의 선동에 따라 유행처럼 시위하고 항의한다고 하는 주장 자체가 국민들을 개돼지로 보는 시각이다.
학문적 권위라는 것은 팩트와 진실을 기반으로 할 때 국민들에게 설득될 수 있는 것이다. 왜 토론회를 하고 공청회를 하는데도 반발이 누그러들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찬화 전라도민연대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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