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 무대읽기]연극 ‘리어 3막, 황야’
지난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간 미로극장(옛 궁동예술극장)에서는 ‘리어, 3막 황야’라는 극이 올라갔다. 극단 ‘우아’의 성화숙 연출가가 시민으로 구성된 배우진을 이끌고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하여 60분 정도의 극을 만들었다. 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일종의 실험극 형태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이다. 나이 든 왕 리어는 왕국을 세 개로 나누어 딸들에게 주고, 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큰딸과 둘째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과장되게 표현하여 원하는 것을 쟁취한다. 하지만 셋째 코델리어는 언니들의 아첨을 보면서 자신은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리어를 화나게 하고 코델리어 몫의 유산은 언니들에게 간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두 딸은 말과는 달리 늙은 아버지를 내친다. 딸들의 배신에 정신이 이상해진 리어는 황야를 헤맨다.
‘리어 3막, 황야’는 여기까지의 내용만 담고 있다. 황야를 헤매는 미친 왕의 이후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리어왕’ 원작에서는 미친 리어를 끝까지 보살피는 충신 켄트와 역시 리어를 보필하는 글로스터 백작의 아들 에드가 등만 살아남고, 늙은 아버지를 배신하는 두 딸, 역시 아버지를 배신한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 에드먼드, 둘째 딸의 남편인 콘오월에 이어 주인공인 리어와 셋째 딸 코델리어까지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이번 ‘리어 3막, 황야’는 세 가지 점에서 일단 흥미를 유발했다. 하나는 배우들이 모두 아마추어라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총 5막으로 되어 있는 원작 희곡을 60분 길이의 단막극으로 구성하면서 ‘리어 3막, 황야’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무대 세트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대본들이다.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전부인 단출한 무대 세트에 ‘리어 3막, 황야’의 대본들이 놓여있는데, 마치 방금 누군가가 읽다가 급히 나간 것처럼 느껴진다.
연극은 어쩌면 관객이 입장함과 동시에 시작된다. 관객이 들어오는 중에 배우들도 한 명씩 무대로 나온다. 배우들은 대본을 하나씩 차지하고 보기도 하고, 옆에 있는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관객들은 준비된 연극 ‘리어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리어왕’ 중에서도 3막 황야 부분을 읽고 있는 배우(혹은 독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그 독자(배우)들은 자신들이 읽은 ‘리어왕’을 연기한다.
그 첫 장면은 글로스터 백작이 등불을 들고 길을 인도하며 폭풍우 치는 황야에서 오갈 데 없는 리어를 좀 더 따뜻하고 안전한 곳으로 모시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리어를 감싸고 보살피는 켄트와 에드가, 그리고 광대가 리어 뒤를 줄줄이 따라 한 줄로 걷는다. 이것은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세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리어왕’을 3막을 중심으로 하여 압축하고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수미일관하게 처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3막 황야 장면은 리어왕의 고통과 광기를 극대화한 부분이다. 한 인간으로서, 한 아버지로서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고통과 그로 인해 생긴 광기에 초점을 맞춘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미친 리어의 광증에 더 중심점이 옮겨졌을 텐데, 이번 ‘리어 3막, 황야’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고통과 광기에 휩싸인 리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며 돌보는 무리에게 방점이 찍혀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까? 단정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느낌은 들었다.
아마추어 시민들이라고 했지만, 전대 극회 출신의 선배와 아직 학생 신분인 후배들이 모여 작품을 만들어서 일반 시민 연극보다는 깔끔한 앙상블이 돋보였고, 무엇보다 무대를 대하는 진지함이 좋았다. 고전을 재해석해서 일반 관객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시도도 좋았다. 연극에 대한 열망이 있는 일반인들이 지속적으로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제도에까지 생각이 미치기도 했지만, 그런 문제는 여기서 논할 것은 아니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