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광주읍지·대동여지도 바탕 ‘대마산’ 지목
전주엔 간 적이 있다. 고속도로 요금소를 통과해 시내 쪽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거리에 내걸린 도로안내판에서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태조로, 정여립로, 견훤로가 보였던 것이다. 태조로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태조 이성계를 가리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전주가 이처럼 도로명으로 이성계를 기념하는 것은 그의 본향이 바로 전주이기 때문이다.
정여립과 이성계, 모두 기리는 전주
그런데 ‘정말’재밌고도 놀라운 사실은 정여립로란 도로명과 전봉준의 동상이 이성계의 본향 도시에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정여립은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전복하려 했던 인물이고, 전봉준 역시 정여립과 맥락은 다르지만 어떻든 조선왕조를 뒤엎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이성계와 대척점에 선 인물이었다.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전주는 한 왕조의 개창자와 그 왕조의 전복 시도자들을 모두 기념하고 있었다. 역사에 대한 열린 사고,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풍부한 감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한편, 시내 도로명 중에는 견훤로도 있었다. 전주가 견훤을 기념하는 것은 서기 900년 견훤이 이곳을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 건국을 선포한 일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전주는 역사상 두 왕조의 건국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국내도시 가운데 견훤을 기념하는 도시가 전주만은 아니다. 강원도 원주도 견훤을 기념한다. 원주의 도로명 중에도 견훤로가 있다. 원주 문막에는 건등산이 있는데 이 산의 관련 설화에 왕건이 견훤을 치기 위에 이 산을 올랐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원주에서도 견훤을 도로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디서나 견훤을 고장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닌 듯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경북 상주 출신이지만 정작 그의 고향인 상주에는 견훤로란 도로가 없다. 견훤이 신라에 위해를 가했고 신라의 명을 단축시켰다는 인식 때문인 듯하다.
광주서 건국 기틀 마련했던 견훤
사실 견훤은 전주나 상주에 못지않게, 그리고 원주보다는 훨씬 더 역사적으로 광주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견훤은 광주에서 처음 신라에 반대하는 세력을 키웠고 사실상 후백제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견훤이 광주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왕건에 맞서 최후까지 후백제의 명맥을 고수하고자 했던 지역도 광주였다. 그럼에도 광주의 어디에도 견훤을 기념하는 장소나 도로는 없다. 오히려 광주에선 견훤과 광주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그런데 조선시대 광주사람들은 견훤대와 방목평을 통해 견훤을 기념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이 견훤대와 방목평의 위치를 놓고 아직도 광주사람들은 설왕설래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읍지’에 의하면, 견훤대는 견훤이 군사를 지휘한 곳으로, 방목평은 견훤이 군마를 기른 곳으로 나온다. 두 곳은 서로 이웃해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 위치에 대해선 막연히‘읍내에서 북쪽 15리에 있다’는 설명으로 그치고 만다. 사실 당시엔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 굳이 길게 설명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사람들은 이런 기억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일종의 역사적 코미디가 펼쳐지고 있다.
1980년대 북구 생룡동 동쪽 죽취봉에서 성터가 발견된 적이 있다. 그 뒤 봇물처럼 그곳이 견훤대라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생룡동 성터는 1930년대 야마모토 데스타로의 ‘광주군사’에 이미 소개된 바 있어 엄격하게 말해 이것은 발견이라기보다 재발견에 가까웠다. 어떻든 그로 인해 이 주장이 상당히 힘을 얻는 듯했지만 여전히 그 근거는 빈약했다. 그래서 견훤대가 망월동이나 오치동에 있을 수 있다는 추론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 추론도 사실 야마모토가 ‘광주군사’에서 내던진 말을 다시 읊는 것에 불과했다.
지도첩 속 광주지도가 가리키는 견훤대는?
그렇다면 견훤대를 알려주는 옛 기록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김정호의 유명한‘대동여지도’에 견훤대가 등장한다. 이 지도에서 견훤대는 지금의 동림동 일대에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물론 대동여지도가 완벽한 역사기록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록만으로 견훤대의 위치를 비정하기도 성급하다.
그런데 ‘비변사인 방안지도’란 지도첩 속의 광주지도에는 보다 분명한 어조의 이런 글이 들어있다. “견훤대는 황계면에 있다.”
황계면은 동림동을 가리키던 조선시대 지명이다. 현재 서영대학교가 들어선 운암산의 다른 이름이 황계산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암산이 견훤대일까? 그렇지는 않다. 운암산 옆에는 대마산이란 또 다른 산이 있다. 높이 100여 미터인 운암산에 비해 대마산은 그보다 조금 낮은 90여 미터쯤 된다. 두 산은 같은 줄기에 나란히 있다. 그런데 광주읍지에서 방목평으로 지칭한 너른 들을 끼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과 부합하는 위치에 있는 것은 대마산이다.
대마산은 석산, 돌산, 뱀산, 배암산, 대무산 등으로 불려왔다. 1970년대 산 아래에 펼쳐진 들 너머의 광주공항을 정탐하던 무장공비들이 발각돼 총격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그만큼 시계가 잘 트인 곳이다. 그리고 이 산을 옛 광주사람들이 견훤대라 인식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동국지도’란 지도첩 속 광주지도에 명확히 나와 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최초 작성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