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41)자전거 도둑, 박완서, 다림

필자는 그 동안 책을 읽고 조금씩 메모해 온 내용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책 소개와 정리, 간단한 소감, 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평가 등 책에 따라 달라진다. 읽기 편한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고 1차 목표는 100권이다. 100권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독자들과의 건강한 토론이라 믿고 있다. <편집자주>

자전거도둑, 박완서, 다림
자전거도둑, 박완서, 다림

 국내외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북한 김정은과 러시아 푸틴의 북-러 정상회담이 진행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장과 연이은 도발, 러시아와의 군사동맹회담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뚜렷하게 비판적 입장을 밝히지 않은 미온적 입장(또는 침묵과 회피)을 보이거나 여전한 반공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는 교사들이 계속해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법률 개정으로 급한 불을 끄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교사들의 끓어오르는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습니다. 학생과 교사의 권리가 서로 충돌이 되지 않도록 정부와 여야 정치인들, 전문가들, 관계자들 모두 모여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사회적 차원의 논의와 연구 등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러한 노력들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가는 올라가고, 취업은 되지 않고, 장기 불황이 지속되니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인지 주식과 부동산 투기로 한탕이나 대박을 터트려야 한다며,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비법을 담았다는 책들과 강연들이 서점과 방송, 라디오, 인터넷 등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부자, 성공만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시대에 주식과 부동산 투기로 벌어들이는 돈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는 주장이 깔려있습니다.

 국제적인 문제와 국내의 사회·경제·정치적인 문제들이 숨쉴 틈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해법과 대안, 방향 등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부 출범 2년째에도 대통령은 여야 영수 회담 한 번 진행하지 않고 있고, 야당에서는 정권 퇴진과 대통령 탄핵, 단식농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상적 국정 논의가 사라진 국회에서는 서로에 대한 비방과 인신공격 등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을 때 우리는 사회의 큰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기도 합니다. 즉문즉답의 명쾌함보다 아주 작은 실마리를 얻기 위함일 수도 있고, 우리가 무얼 놓치고 있는 건지 돌아보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고 박완서 작가의 ‘자전거 도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작품은 1979년에 발표되었는데, 다림출판사에서 1999년 어린 독자들을 위해 여섯 편의 단편들을 묶어 출판하였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다음처럼 작품의 창작동기와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내가 쓰고 싶어서 쓴 미발표 원고를 묶었다는 것으로도 나에게는 의미 있는 책이다. 그때도 나는 원고 청탁에 몰리는 조금도 한가하지 않은 작가였는데도 왜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었을까. 아마 7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소설로는 못 풀어낼 답답한 심정을 동화라는 형식에 의탁하고자 했을 것이다(‘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의 창작동기와 의미부여가 “7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를 40여 년이나 훌쩍 넘어선 2023년에도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사회의 큰 어른이었던, 작가 박완서

박완서, 나무위키.
박완서, 나무위키.

 박완서 작가는 1931년에 출생하여 2011년 79세(기존 8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작가에 관한 기본 정보와 문학사적 의의는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보아도 여기저기 관련 정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문인들이 그를 기리며 밝힌 내용을 잠깐 인용해보겠습니다.

 “언제든 찾아가 기대고 싶은 우리 문학의 가장 중요한 기둥”(정세랑).”, “선생님은 40년 동안 끊임없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써 오셨습니다. 예순에도, 칠순에도, 여든이 되실 때까지도 영원한 ‘현역’이셨습니다.”(정이현)(박완서, 나무위키).

 필자가 작가를 문단뿐 아니라 사회의 큰 어른으로 생각하는 건 다음과 같은 사건 때문입니다. 평소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던 작가였는데, 2001년 한국 문학사에 유례가 없었던 “책 장례식”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가 봅니다.

 “책 장례식”은 2001년 11월 한 시민운동가의 주도로 작가 이문열 씨 거주지 동네어귀에서 “이문열 씨 책은 독극물, 10원에 팔겠다”는 책 반환행사였습니다. 당시 이 씨의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 등의 시론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 일부가 이 씨의 소설을 반환하겠다며 전국에서 기부받은 이 씨의 수백 권의 책을 관의 형태로 묶어 ‘운구’하고, 어린 여자아이에게 이 씨의 책 표지사진을 모아 만든 ‘영정’을 들려 모의 장례식을 진행하였던 사건이었습니다(조선일보, 2001.11. 4).

 이런 폭력적인 분위기에 소신 발언을 하는 건 ‘마녀사냥’으로 몰려 ‘신상털이’를 당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되거나, ‘대중의 공적’으로 몰려 ‘작가의 생명’마저 끝나는 위기의 순간이었겠지요. 그런데 박완서 작가는 한 명의 작가이자, 문단의 원로로서 자청해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까지 문학이 모독 당하는 일이 생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이문열 씨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에겐 최소한 그런 상처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수많은 문학 단체의 침묵은 또 뭡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없이 그냥 넘기는 건 문학 하는 사람들의 도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동아일보, 2001.11.22.).”

 프랑스 혁명기 그가 하지 않았지만 볼테르가 한 말로 널리 알려진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당신의 의견이 핍박당한다면 나는 당신의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자전거 도둑’은 ‘어른’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어린 ‘수남이’가 그리워하는 ‘어른’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꼭 어른이 아니어도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집단의 말에 대해서도 귀 기울이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아주 조금의 여유라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노동착취에도 성실한 수남이

 열여섯 살 수남이는 청계천 세운 상가 뒷길 전기 용품 도매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서울에 와서 거지도 안 되고 깡패도 안 되고 어엿한 가게의 점원”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이기에 자기 또래 교복 입은 고등학생만 보면 심장이 짜릿하고 감전된 거처럼 이상한 힘이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데 변두리 전기 상회나 전공들로부터 수많은 알밤을 맞아 가며 전기 부품 이름들을 외우며 상대해야 했고, 늘 ‘꼬마’라고 불리웁니다. 그럴 때마다 주인 영감님은 수남이를 편들며 상대에게 불호령을 내립니다. “왜 하필 남의 머리를 쥐어박어? …. 공부 많이 해서 대학도 가고 박사도 될 머리란 말야. 임자들 같은 돌대가리가 아니란 말야. …. 야학이라도 일류로, 그래서 인석이 그저 틈만 있으면 책이라고, 허허 ….” 그럴 때마다 수남이는 주인 영감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수남이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물뿌리개로 골목길에 물을 뿌리고는 긴 골목길을 남의 가게 앞까지 말끔히 쓸고 나서 가게 안 물건 먼지를 털고, 어떡하면 보기 좋을까 연구를 해 가며 다시 진열을 하고 제 몸단장까지” 끝냅니다. 주인 영감님은 그때서야 나옵니다.

 수남이의 성실성은 계속 이어집니다. 월급이 짠데도, “점원이 적어도 세 명은 있어야 해 낼 가게 일을 혼자서”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신문 한 귀퉁이 읽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게 문을 닫고 셈을 끝내고 저녁을 먹고 나면 밤 11시가 됩니다.

 우리는 주인 영감님이 어린 수남이의 마음과 행실을 잘 알기에 이를 이용하여 엄청난 ‘노동착취’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루 14~16시간의 장시간 노동, 세 명 이상의 노동강도, 저임금, 거기에 폭력에 노출되고 있는 노동조건, 수남이를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어리고 착한 마음을 이용해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주인 영감님의 말빨(이데올로기)까지.

 그럼에도 수남이는 결코 “혹사당하고 있다는 억울한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바람 부는 날, 수남이의 자전거가 외제차를 긁다

신사에게 붙잡힌 수남이(본문 삽화)
신사에게 붙잡힌 수남이(본문 삽화)

 겨울이 가고 봄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해보다도 길게 해 먹은 겨울은 뭘 아직도 덜 해 먹었는지 화창한 봄날에 끼여들어 심술을” 부립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데, 가게 판자 문이 나자빠지고, 함석 지붕이 뒤집힐 듯 펄럭이고, 골목 위 전화줄에서는 종일 “귀신 휘파람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다 전선 도매집 간판이 떨어져 길을 가던 아가씨의 정수리를 받았습니다. 전선 도매집 사장이 아가씨를 부축해 병원으로 달려가고, 사람들은 모두 전선 도매집 사장과 아가씨가 재수없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수남이는 서울 사람들에게 바람이 반가울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시골의 바람부는 날, “보리밭은 바람을 얼마나 우아하게 탈 줄 아는가, 큰 나무는 바람에 얼마나 안달맞게 들까부는가”를 생각하며 고독해집니다. “봄바람이 게으른 나무들에게, 잠든 뿌리들에게, 생경한 꽃방울들에게 얼마나 신기한 마술을 베풀고 지나갔나를 모르”고, “봄바람이 한차례 지나고 거짓말같이 화창하고 아늑하게 갠 날, 들판이나 산등성이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서울 사람들이니.

 그런데 여느 날처럼 자전거로 배달을 갔던 수남이는 금고에 돈이 뻔히 있는 게 보이는데도 돈을 안 주려는 사장과 실랭이를 하다 겨우 건네 준 돈을 받아 돌아오는데 자전거가 넘어져 있는 걸 발견합니다. 날아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해 자전거를 움직여 출발하려는데, 신사가 사납게 뒷덜미를 붙잡습니다. 수남이의 자전거가 바람에 넘어져 자신의 비싼 고급외제차에 흠집을 내었으니 수리비를 달라고.

 잘못했다며 사정하며 용서를 비는 수남이에게 신사는 수리비도 내지 않고 내빼려는 “악질 깡패 녀석”이라 몰아붙이고는 실랑이를 하는 게 시간 낭비라며 비서에게 자물쇠를 사오게 합니다. 그리고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고는 저기 호텔에 묵고 있으니 돈 가지고 오라고 하고는 가버립니다.

 바보가 되어 버린 거처럼 멍청히 서 있는 수남이에게 주변 사람들이 한 마디씩 던집니다. “토껴라 토껴, 그까짓 것 갖고 토껴라.”, “그까짓 거 들고 도망가렴. 뒷일은 우리가 감당할게.”, “도망가라, 어서어서 자전거를 번쩍 들고 도망가라, 도망가라.”

 수남이는 자기 편을 들어준 많은 사람들을 외면할 수가 없어 자전거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가게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숨이 헉헉 찹니다. 궁금해하던 주인 영감님에게 숨을 고른 후 사정을 말해주니 “잘 했다, 잘 했어. 맨날 촌놈인 줄만 알았더니 제법인데, 제법이야”하며 칭찬을 합니다. 그때서야 수남이는 주인 영감님의 얼굴빛이 똥빛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수남이의 내적 갈등

 수남이는 다른 날처럼 늦은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앉았는데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집어 던져버립니다.

 “낮에 내가 한 짓은 옳은 짓이었을까? 옳을 것도 없지만 나쁠 것은 또 뭔가. …. 수남이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낮에 자전거를 갖고 달리면서 맛본 공포와 함께 그 까닭 모를 쾌감을 회상한다. 마치 참았던 오줌을 내깔길 때처럼 무거운 억압이 갑자기 풀리면서 전신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는 그 상쾌한 해방감 - 한 번 맛보면 도저히 잊혀질 것 같지 않은 그 짙은 쾌감, 아아 도둑질 하면서도 나는 죄책감보다는 쾌감을 더 짙게 느꼈던 것이다.”

 수업시간에 수남이의 행동에 대해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키기도 합니다. 옳은 일인가 아닌가, 잘 한 일인가 아닌가, 정당한 일이었나 아니었나, 어쩔 수 없었나 피할 수 있었나 등 주제를 바꿔 가면서 토론을 시켜봅니다. 이와 비슷한 주제로 ‘선의의 거짓말’ 또는 하얀 거짓말, 착한 거짓말은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 좋은가 나쁜가도 있습니다. 어느 주제이든 학생들의 활발한 토론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필자는 이보다 수남이의 내적 갈등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내적 갈등의 경우 비슷한 인디언 속담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천사와 악마가 싸우고 있단다. 누가 이기나요? 자신이 밥을 많이 주는 쪽이 이긴단다.

 수남이의 내적갈등이 ‘어디로 향하는지’ 좀더 분석해 보겠습니다. 수남이가 자전거를 들고 튄 건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도둑질이었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데서 오는 ‘두려움’, 자신의 어린 인식의 세계로는 감히 가늠해 볼 수 없는 무지의 세계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이내 “공포”가 되어 자신의 전신을 휘어감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하게 수남이는 “까닭 모를 쾌감”을 느낍니다. “참았던 오줌을 내깔길 때처럼” “전신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는 그 상쾌한 해방감”을 말이지요.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자신의 인식과 마음을 ‘양심’이란 놈이 금제를 걸어 놓은 거처럼 막고 있었는데, 자전거를 들고 뛰는 순간, 잠시나마 그게 풀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수남이는 “도둑질 하면서도 나는 죄책감보다는 쾌감을 더 짙게 느꼈”다며 치를 떱니다. 16살인 수남이 스스로도 학생들이 토론을 하는 거처럼 자신의 내적 갈등을 통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수남이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행위를 한 자신의 내면에 이미 그러한 갈등 상황에 대해 정당화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치를 떨 정도로 실망합니다.

 그가 주인 영감님의 얼굴에서 똥빛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그 순간 수남이의 얼굴빛도 똥빛이었기 때문이지요. 작가가 만들어 놓은 ‘똥빛’의 상징을 풀어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유일한 판단 기준이 ‘돈’이라는 겁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결국 ‘돈’, ‘황금’이 최고이니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향으로만 생각이 움직이는 거지요.

 수남이의 깨달음

길 떠나는 수남이(본문 삽화)
길 떠나는 수남이(본문 삽화)

 수남이의 내적 갈등의 진행 상황을, 필자는 수남이 내면에 존재하던 ‘내적 자아의 초자아로의 상승’이라고 불러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성장’이나 ‘성숙’이라고 부르지요. 즉, 수남이 안에 존재하던 자아 내면에서 서로 상반된 자아들이 싸우고 있는데, 그렇게 싸우고 있는 자기 자신을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상반된 어느 쪽으로 결정하고 그걸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그런 자신의 내적 갈등 상태 자체를 문제시 하는 거지요.

 그렇게 높은 곳에서 수남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수남이의 얼굴빛은 똥빛이었겠지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초자아를 보통 ‘사회적 양심’이라고 부르겠지요. 하지만 아직 어린 수남이는 그런 초자아로서의 자신이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확신보다는 그런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 누군가 훈계를 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왜 그렇게 못났냐고, 왜 그렇게 세상을 사느냐고. 이렇게 해야 한다며 이끌어 주기를 바라겠지요.

 “소년은 아버지가 그리웠다. 도덕적으로 자기를 견제해 줄 어른이 그리웠다. 주인 영감님은 자기가 한 짓을 나무라기는커녕 손해 안 난 것만 좋아서 “오늘 운 텄다”고 좋아하지 않았던가. / 수남이는 짐을 꾸렸다. 아아, 내일도 바람이 불었으면, 바람이 물결치는 보리밭을 보았으면. / 마침내 결심을 굳힌 수남이의 얼굴은 누런 똥빛이 말끔히 가시고, 소년다운 청순함으로 빛났다.”

 우리는 보통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남이와 같은 양자택일의 경우를 수도 없이 경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유들을 수만 가지 만들어냅니다.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통일의 이름으로, 태극기와 민주의 이름으로, 경제성장과 발전의 이름으로, 대의라는 이름으로, 다수라는 이름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진보라는 이름으로, 부자와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그렇게 산다는 이유로.

 그리고 결정이 끝나면 반대쪽은 가차없이 무시합니다. 이와 같은 행위들이 개인 안에서뿐 아니라 집단과 단체, 정당, 국회, 나라 안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겠지요.

 지금은 가고 없지만 사회의 큰 어른이었던 박완서 작가가 비록 동화 속 인물일지라도 수남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세상의 편협한 기준에 물들어가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자기 집단의 얼굴빛이 똥빛으로 변하는 줄 모르고 자신/자기 집단만 깨끗하고 당당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집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정당화하는 시대에는 특히 더.

 그렇다고 수남이와 같은 사람이 나오기를, 작가와 같은 사람이 나오기를,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어떤 ‘영웅’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 모두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여유를 가지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기를 노력하고 기대하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올라있는 어느 독자의 ‘자전거 도둑’ 감상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바람이 불어야 배가 가듯이” 우리 모두는 여러 시련에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요.

 “나에게도 모든 순간이 단애에 선 듯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한 발자국만 떼면 정말 끝날 것 같았는데, 거짓말처럼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망설이다 받은 전화의 수화기 너머로 ‘사랑하는 아무개야, 뭐 하고 있었어? 저녁은 뭐 먹었어?’라고 묻는 친구의 목소리에 꾹꾹 눌러담은 울음이 담겨 있어서 나는 그날 죽지 않기로 결심했다(알라딘 ‘자전거 도둑’ ‘마이리뷰’ 중에서).”

 백청일(논술학원장)

 ■ 참고문헌

 자전거도둑, 박완서, 다림, 2002.

 박완서, 나무위키.

 박완서 “문학이 모욕당해야 하는가”, 동아일보 2001.11.22.

 ‘이문열 책반환’ 모의장례식, 조선일보 2001.11. 4.

 이문열 “‘책 장례식’ 때 날 옹호해준 건 박완서 뿐”, 머니투데이 2011.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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