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중국차 茶](29)황제도 반한 서호용정(西湖龍井)
“서호에 서호용정 없고, 운남엔 보이차가 없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배 가운데 대부분은 ‘나주배’ 상표가 찍힌 박스에 담겨있고, 참외는 ‘성주참외’의 박스에 담겨 판매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상품을 만나면 우선은 포장 상태를 본 다음에 실물의 외형을 본다. 그러나 아무리 그 외형을 들여봐도 모두가 같은 ‘나주배’일뿐 정작 서로간의 형질특성 등에 관한 정보가 없다 보니 소비자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설령 소비자가 샘플 배의 맛을 보고 샀다손 치더라도 샘플과 실제 포장된 제품이 모양만 같을 뿐 그 내용이 다르다면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기도 하다.
기실 이와 같은 일들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더군다나 금전과 관련된 일이기에 앞으로도 근절되기 힘든 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차 역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유명한 차가 있으면 반드시 그와 비슷한 형태의 차들이 등장하여 소비자의 이목을 혼란스럽게 한다.
적지 않은 한국의 차인들이 마셨던 벽라춘이 실상은 귀주모첨이었고, 최고의 홍차라는 동목관의 금준미가 알고보면 금호(金毫)만 가득한 정체불명의 짝퉁 홍차였다는 점은 앞서서도 설명한 바가 있다.
차는 △아예 처음부터 소비자를 속여 폭리를 취하고자 작정하고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진품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속칭 ‘짝퉁’과 △본래가 우수한 품종이나 그 생산량이 적어 소비자들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다른 다수확의 품종과의 유성번식을 통하여 만들어 낸 ‘개량종’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중국의 강남은 우리보다 한 달 정도 계절이 빠르다. 그렇기에 여행도 일찍 시작되어 이른 봄 대략 3월 하순쯤에 항주의 서호에 유람을 가보면 호반의 수많은 점포에서 용정차를 덖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중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과장법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모든 음식을 한 번씩 맛보기가 힘들다”라고 할 정도로 중국대륙은 드넓다. 그렇기에 관광지인 서호 역시도 한 번 오고 나면 다시 찾아오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른 봄의 상춘객들은 대부분이 차가 나오지 않는 강북의 사람들이다 보니 말로만 듣던 서호용정의 첫물차를 얻을 수 있다는 기쁨에 기꺼이 지갑을 연다.
차를 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인들에게 “이게 진짜 서호용정이냐?” 물으면,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지금 네 눈앞에서 덖고 있지 않냐?”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하지만, 발걸음을 조금만 옮겨 부근의 차산으로 올라가 보면 이제야 겨우 싹을 틔우려는 차나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그 찻잎들은 무엇일까?
정답은 중국정부에서 재래종 용정차를 개량한 품종인 용정43호를 전국에 보급하면서 항주보다 더 따뜻한 남쪽에서 무수히 많은 개량종 용정차의 찻잎들이 항주로 올라와서 벌이는 호가호위(狐假虎威) 혹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의 굿판을 벌이는 사례이다.
이렇다 보니 서호에는 서호용정이 없고, 운남에는 보이차가 없으며, 무이산에는 무이암차가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차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진품의 차를 만드는 차창이나 농가에서는 대도시의 도매상들과 그 해 만들어진 차의 대부분을 공급하기로 이미 계약이 끝나 있기에, 차는 만들자마자 대도시로 떠나간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업계의 소식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 소비자들은 늘 호구 고객이 되기 일쑤이다.
이번과 다음 회에는 중국 10대 명차 가운데 대표적인 녹차인 서호용정의 개량종을 실례로 들어보도록 하겠다. 개량종은 그 외형이나 맛은 비슷하지만, 진품에는 미치지 못함을 전제로 하고 봐야만 한다.
명우(名優: 우수한 품질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녹차 가운데 하나이자 중국 10대 명차의 반열에 올라 있는 서호용정(西湖龍井)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 자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선 서호용정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절강성 항주(杭州)에 있는 유명한 관광지인 서호(西湖)의 용정촌(龍井村) 일대에서 자라는 차를 말한다.
청대의 건륭제(乾隆帝)가 서호로 내려와 유람할 때 용정차를 마신 후 그 맛에 감탄하여, 용정촌의 사봉(獅峰)에 있는 18그루의 차나무를 어차(御茶·황제가 마시는 차)로 지정하여 더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1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서호용정은 조미색(糙米色·올벼 쌀)의 빛깔에, 고소한 콩꽃 향이 나며, 시원함과 단맛이 일품이라서 중국 10대 명차의 반열에 자리할 만큼 명성이 자자한 차이다.
그에 더해 용정차는 유념할 때 그 평평하고 넓은 모양을 잡아주기 위해 손바닥으로 눌러줘야 하는데, 이때 찻잎이 솥에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구유(乌桕油)라는 오구나무 열매로 만든 백색의 불투명한 식물성 기름을 솥에 발라주는 것이 특징이다.
용정차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고소한 맛은 오구유 때문이다. 오구유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공 합성된 기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사진에 보이는 백색의 속껍질을 제거한 파라핀 형태의 속살을 긁어내 압착하여 짜낸 기름이었다.
대다수의 중국차들과 마찬가지로 용정차도 극품(極品: 품질이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는 최고의 등급), 특급(特級), 1~6급의 8개 등급으로 나눈다고 보면 된다.
가장 이른 봄에 채취한 첫물차인 극품은 1아1엽의 형태이고, 그 싹과 잎의 길이가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서호용정 가운데서도 어차원이 있는 사봉(獅峰), 매가오(梅家塢), 운서(雲栖), 호포(虎跑) 등지의 용정차가 재래종의 특성을 잘 갖추고 있다.
류광일(덕생연차관 원장)
류광일 원장은 어려서 읽은 이백의 시를 계기로 중국문화에 심취했다. 2005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사범대학에 재학하면서 덕생연차관 주덕생 선생을 만나 2014년 귀국 때까지 차를 사사받았다. 2012년 중국다예사 자격을, 2013년 고급차엽심평사 자격을 취득했다. 담양 창평면에 중국차 전문 덕생연차관(담양군 창평면 창평현로 777-82 102호)을 열어 다향을 내뿜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