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등을 지도하다 경찰서에 연행된 휴학생은 이후 자신의 모든 노래가 방송금지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70년대를 상징하는 ‘아침이슬’과 불멸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 등을 만든 김민기.
제대 후 그는 부평 봉제공장에 위장취업,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경제적 이유로 식을 올리지 못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라는 제목의 합동결혼식 축가를 만들었다.
1978년 12월 27일 광주 녹두서점을 방문한 그는 김상윤 사장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노동운동가 박기순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비보였다.
‘야학’을 따뜻하게 해줄 땔감을 구하러 화정동 야산에 올랐다 늦게 귀가한 그녀가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그해 여름 전남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당시 가두시위를 주동하다 제적된 광주지역 첫 위장취업자, 호남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을 창립했던 샛별 같은 노동자의 황망한 죽음이었다.
# 다음날 전남대병원 영안실에선 스물두 살 망자의 영결식이 열렸고 김민기가 낯선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훗날 <상록수>로 제목이 바뀐 노래가 작곡자 스스로에 의해 처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결혼식 축가가 영결식 조가로 바뀌어 조문객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군복바지와 낡은 티셔츠를 즐겨 입던 당찬 여학생 박기순은 그렇게 남은 이들의 흐느낌 속에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김민기가 특유의 저음으로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말라고’ 읊는 대목에선 참석자 모두 울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은행을 다니다 노동자 곁으로 돌아오려 사표를 냈던 청년 윤상원. 박기순의 권유로 들불야학에 참여한 그도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는 당일 일기에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두고 모든 사람들 서럽게 운다’고 썼다.
영결식 1년 6개월 후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사망 2년이 지난 어느 날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두 달 후 박기순의 영결식에도 참석했던 황석영 등이 자신의 운암동 자택에서 두 사람의 슬픈 결혼식을 기린 노래극 ‘넋풀이’를 만들었고, 그 안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삽입됐음은 널리 알려진 바다.
#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자 김종률의 멘토이기도 했던 김민기, 그는 현재 암과 싸우고 있다.
1991년 문을 연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도 창립 33주년을 맞는 내년 3월 15일 폐관할 예정이다.
만성적인 재정난에 그의 건강 문제가 겹친 것이다.
‘아침이슬’과 ‘상록수’ 등의 음반 계약금으로 극장 문을 열었고 저작권료와 살던 집까지 담보로 쏟아부어 운영했던, 배울 학(學)에 밭 전(田)자를 쓰는 학전은 김민기의 평생 일터였다. 김광석, 들국화, 유재하, 강산에, 동물원, 안치환 등 통기타 가수들이 그 곳에서 스타로 성장했다.
학전을 상징하는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도 설경구와 황정민, 조승우 등 스타 배우들을 다수 배출했다. ‘지하철 1호선’은 1994년 초연한 이래 8000회 공연, 누적 관객 70만 명을 달성하며 뮤지컬계의 역사를 쓴 작품이다.
앞으로 폐관까지 뮤지컬 ‘지하철 1호선’과 김광석 노래 경연대회, 어린이극 ‘고추장 떡볶이’를 남겨뒀다. 마지막 공연은 학전과 인연을 맺은 가수들의 출연료 없는 릴레이 콘서트다.
엄혹했던 시기, 광주와 어깨를 겯던 문예계 거장의 건강을 소망한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