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 대표가 모여 3.1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은 세종로에 있던 최초의 궁중요리 전문점인 명월관의 종로 분점이었다. 태화관 터는 원래 매국노 이완용의 별장 자리였으니 역사적 아이러니다.

 1925년 4월 17일 제1차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결성된 장소도 당시 장안 최고 청요리집인 아서원이었다. 또 자유당 2인자였던 이기붕이 해방 전 국일관에서 4년 정도 지배인을 지내는 등 정치인과 고급 사교장의 인연은 의외로 두텁다.

 남산 자락의 ‘외교구락부’도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양식당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직선제가 도입되자, 국민 70% 이상은 두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 김대중 중 한 분이 연말 대선에서 승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멀리는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양김의 라이벌 의식과 ‘상도동’(김영삼계)과 ‘동교동’(김대중계)의 단단한 인맥은 기어이 민주당을 분당 위기로 몰아넣었다.

 6월항쟁의 동맹군인 재야와 당 안팎 단일화 추진 인사들의 단식이 잇따르는 가운데 DJ와 YS는 결국 외교구락부에 등 떠밀려 나타났다.

 은은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 마주한 두 야당 지도자의 회동 결과에 국민들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배석자 없이 진행된 담판은 끝내 성과없이 종료됐고 두 달 뒤 분열된 양김에 표를 던졌던 지지자들은 엄청난 분노와 허탈감을 오랫동안 이겨내야 했다.

 이후 우리 역사가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는 생각만 해도 착잡하다.

 # 양김의 외교구락부 회동 당시 ‘동교동’을 마크하던 동아일보 이낙연 기자는 주차장에 대기하던 DJ의 차에 미리 타고 있었다. 전용차 기사와 친하게 지낸 덕이었다.

 귀가하던 DJ는 이 기자에게 자신이 양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로 이른바 ‘지역 문제’도 꼽았다. 그리곤 “내가 물러서면 앞으로 25년간 호남에서 인물(대통령 감)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덧붙인다.

 이낙연은 15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닌, 분명 25년이라고 한 그의 말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의 이 발언이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과 함께 DJ가 나서면 반드시 이긴다는 소위 ‘4자필승론’을 위한 변명이었는지, 아니면 정치 9단 나름의 혜안에서 비롯된 일종의 예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DJ는 그 10년 후 우여곡절 끝에 청와대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정확히 25년 후인 2022년, 이낙연은 대권에 가장 근접한 호남 출신 정치인이었다.

 호남은 영남과 함께 지난 수십년간 대부분 특정당의 공천이 곧 당선이었다. 물론 이 같은 비정상이 지역 정치인들의 탓만은 아니다.

 그러나 본인들이 당선에 유리한 기존 지형을 유지시키려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며, 동시에 스스로 전국적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시 ‘공짜점심’은 없는 법이다.

 # 1987년 12월 들어 양김은 이미 패배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급거 귀국한 김경재, 정동채 등의 재미 언론인이 동교동을 찾아가 ‘선생님 이대로 가면 노태우 후보가 당선됩니다. 지금이라도 단일화 협상을 재개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했다.

 돌아온 답변은 ‘투- 레이트(너무 늦었어)’였다.

 엊그제 이재명-이낙연 담판이 성과없이 끝났다. 분열에 대한 책임론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려던 만남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1987년 양김처럼 두 사람의 논리에 각자 일리가 있어 해법도 쉽지 않다. 야권의 총선 전망에 적신호가 켜졌고 여권은 내심 반색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득 칼 마르크스의 말이 떠오른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소극으로...” (독자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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