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곰순의 귀촌일기](78) 한 해를 시작하는 항아리 이야기

 곰돌곰순은 한재골로 바람을 쐬러 가다 대치 마을에 매료되었다. 어머님이 다니실 성당이랑 농협, 우체국, 파출소, 마트 등을 발견하고는 2018년 여름 이사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마당에 작물도 키우고 동네 5일장(3, 8일)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막걸리에 국수 한 그릇으로 웃음꽃을 피우면서 살고 있다. 지나 보내기 아까운 것들을 조금씩 메모하고 사진 찍으며 서로 이야기하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면 좋겠다 싶어 연재를 하게 되었다. 우리쌀 100% 담양 막걸리, 비교 불가 대치국수가 생각나시면 대치장으로 놀러 오세요. <편집자주>

곰순이 담은 ‘곰순이표 물김치’.
곰순이 담은 ‘곰순이표 물김치’.

 곰돌이 저녁에 집에 오니 주방 바닥에 항아리가 보입니다. 곰순이 왈, 대문 옥상 장독대에 젓갈 담겨진 항아리였는데 젓갈이 상해서 가져와서 비워 내고 깨끗이 씻어 햇빛에 소독한 후에 들여놓은 거라고.

 멸젓과 조선간장, 된장 등 전통방식으로 음식을 요리하셨던 어머님 손맛에 길들여진 입맛이라 곰돌이뿐 아니라 온 가족이 멸젓을 좋아한답니다. 가족 행사 때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누군가, 이거 멸젓 아니여, 하면 어디 어디, 할 정도로 눈들이 돌아간답니다. 멸젓이라면 그 자리에서 밥에 비벼 공기 한두 그릇도 뚝딱 해치울 정도.

 귀촌 이후, 소금기도 최소로 하고, 당분은 아예 쓰지 않는 식단으로 바꾸었더랍니다. 집에 있던 설탕을 다 버렸을 정도이니. 날마다 먹는 마당의 채소 샐러드와 겉절이, 제철 과일들을 갈아 마시는 과일쥬스만으로도 천연 당분이 충분하니까요.

 그래도 젓갈이 담겨 있던 항아리가 비어 있는 걸 보니 곰돌이 미련이 좀 남습니다. 엄니가 아껴 놓은 젓갈이었을 텐데. 어쩌면 추억일 수도 있는데. 아쉬워하는 눈빛을 읽은 곰순이 한마디 합니다. 이미 오래 되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은 냄새가 심했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거기에 아주 맛있는 물김치를 만들어 넣어 둘 거라고.

 그러더니 보리밥을 하고 감자를 쪄서 믹서기에 갈고, 마당의 겨울 무, 갓, 쪽파, 봄동, 케일, 당근으로 물김치를 만듭니다. 뒤안에 놓은 지 사나흘쯤 지나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니 유산균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게 보입니다. 항아리를 김치냉장고에 넣을 시간입니다. 다음날부터 식사 때마다 한 사발씩 떠와서 먹는데, 맛이, 크, 예술입니다. 대체나 곰순이 장담할 만합니다. 이름 하야, ‘곰순이표 물김치’라나요.

김치냉장고의 항아리들
김치냉장고의 항아리들

 냉장고 김치통을 항아리로 바꾸다

 곰순이의 항아리 사랑이 2년쯤 되었습니다. 어디에선가 정보를 듣고 온 날 곰돌이에게 쭈욱, 설명을 하더니 우리도 그렇게 한번 해 보자고. 다음날 바로 비어 있는 항아리를 찾아 깨끗이 씻어 햇볕에 소독하며 말린 후, 김치냉장고에 있던 플라스틱 김치통에 있는 김치를 항아리에 옮겼습니다. 김치 전용 냉장고라 여러 종류의 김치들이 김치냉장고용 플라스틱 통에 담겨 냉장고 가득 있는데, 일단 하나만 해 보기로.

 항아리를 집어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아리 크기를 사전에 맞춰보지 않으면 항아리 하나만 들어가고 다른 건 아무 것도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곰순이 미리 플라스틱통과 항아리 크기를 다 재보았는지, 항아리가 쏘옥, 들어갑니다. 안성맞춤.

 며칠 지나 김치냉장고에 있는 항아리 김치를 내어 먹어보니, 씹는 맛이 아삭아삭합니다.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을 때에는 결코 맛보지 못한 맛이었습니다. 항아리는 물은 새지 않지만, 그보다 입자가 작은 공기 입자는 통과하니 김치냉장고의 냉기가 김치의 숙성을 늦춰주고,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거 같습니다.

 곰순이는 그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 있는 비어 있는 항아리를 둘러보고, 크기를 재어 보고, 김치냉장고에 있는 플라스틱 통들에 각각 김치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조사했답니다. 그리고 항아리들을 씻고, 소독하고, 말린 후에, 각종 김치들을 항아리 크기에 맞게 옮겼겠지요.

 며칠 후부터 식사 때마다 항아리 김치를 꺼내서 먹었습니다. 가끔 부엌에 있는 냉장고에 김치를 넣어 둘 때도 있는데, 그때의 김치와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때면 김치냉장고에 있는 항아리 김치를 한 끼 먹을 양만 빼서 아삭하게 먹는 게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새로 알게 된 사실. 작년 김장철에 집에서 담근 것도 있고, 주변 여기저기서 주신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걸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 놓은 항아리들에 김장김치들을 담아 뒤안 시원한 곳에 일주일 정도 놓아 둔 후, 김치냉장고에 넣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먹는데 역시 맛이 시원하고 아삭합니다.

 그런데 김장김치를 받을 때는 모든 김치들이 집마다 차이가 있으면서도 맛있게 느껴졌는데, 항아리에 넣어 두고 시간이 지나서 맛을 보니, 시원하고 아삭한 맛은 있지만, 각 집에서 만든 김치맛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게 느껴졌습니다.

 알게 된 사실은 더 있었으니, 김치 종류에 따라 김치를 담은 뒤 뒤안에 며칠을 놓아 두었는지 그 기간에 따라 김치맛이 또 조금씩 달랐습니다. 곰순이 여러 종류의 물김치를 담아 시험해 보니,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김치의 숙성기간과 맛에 대한 지식보다 좀더 긴장하며 그 기간을 체크하면서 김치냉장고에 넣어야 했습니다. 유산균 변화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건 필수가 되었습니다. 플라스틱통에 든 물김치와 항아리에 든 물김치를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요.

정자에서 소독하고 말리고 있는 항아리
정자에서 소독하고 말리고 있는 항아리

 “나뭇잎이 물들고 싶다고 이른 봄철에 단풍이 될 수 없듯”

 항아리. 늘 채워지고 비워지는 항아리. 항아리마다 쓰임새가 다르고 가치도 다르지요. 조선 백자달항아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그중 어떤 것들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또 어떤 조선 백자달항아리는 뉴욕 어느 미술관에서 60억에 낙찰되었다고도 합니다.

 나오지 않았으면 모를까, 항아리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이미 항아리로서의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겠지요. 그 안에 무얼 담기도 하고, 비우기도 하고, 그 자체로 전시되기도 하고, 옮겨 다니기도 하고,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푸대접을 받기도 하고, 긁혀서 흠집이 생기기도 하고, 주둥이의 이가 나가기도 하고, 약간의 금이 가서 버리기 아까워 화분이나 장식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우리네 삶도 그러는 게 아닐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항아리 숫자만큼 사람들이 있는 건지, 아니,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 숫자보다 항아리가 더 많을 거 같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사람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우리 모두는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이기에 아주 귀한 곳에 쓰이겠지요. 하는 일도 다르고 세상의 가치평가 또한 다르겠지만, 모두 자신의 삶의 목적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자신의 운명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거겠지요.

 비어 있는 항아리를 보면, 무언가 채우고 싶고, 가득 차 있는 항아리를 보면, 만족하며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곰돌곰순이도 늘 그래왔던 건 아닐까요. 배우면 즐겁고, 얼른 익혀서 내 걸로 만들고 싶고, 그걸 확인하고 싶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조바심을 내고 그랬던 건 아닌지.

 바람이 부니 나뭇잎이 흔들리고, 배가 움직인다고 하지만, 다르게 보면, 바람이 불어야 나뭇잎이 흔들리고 배가 움직이는 법이지요. 이걸 또 뒤집어 보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며 바람이 부는 걸 알고, 배가 움직이는 걸 보며 태풍이 부는 걸 알기도 하지요.

 살아 있으니 바람이 부는 것도 느끼고 알고, 바람이 부니 살아 있음을 느끼고 알게 되고, 그리고, 또 그리고, 살아 있음으로써 너무 고통스러운 일도 많다는 것도 알게 되지요.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요. 세상 모든 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월을 따라 흘러가고, 변하는 법이니까요. “나뭇잎이 물들고 싶다고 해서 이른 봄철부터 단풍이 될 수는 없듯이.”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구정을 지나야 본격적으로 한 해가 시작된다고도 합니다. 1월 1일이 되었어도 작년 마지막 날 하루와 별 차이가 없이 똑같은 해가 떠올랐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살다 보니 일의 매듭과 과정이라는 게 있고, 그 과정이라는 건 그야말로 특정 시점이 아니라 일련의 기간이라고 하니, 올 한 해의 시작을 좀더 여유롭게 시작해도 될 거 같습니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곰돌 백청일(논술학원장)·곰순 오숙희(전북과학대학교 간호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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