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제주로의 퇴각과 회복기

관탈도와 한라산.
관탈도와 한라산.

 뭔가가 퇴화되기 시작하고 그 앙금은 계속 침전되고 쌓여 가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날의 연속이었다. 매일 뒤척이는 잠은 일과를 지치게 만들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표정까지 관리하며 또 시간이 흘러갔다. 간혹 산이라도 가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아니면 저수지에 낚시대를 드리거나 사무실 앞 뜨락에 동박새라도 찾아오면 그것이 휴식다운 휴식이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는 것이 사치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든게 답보 그 상태일 것 같은 날, 어느새 나는 항공사의 홈페이지에서 제주행의 저렴한 티켓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주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 갈건데 가도 되는 것인지를 질문했다.

 명쾌하게 돌아온 대답은 두 명이 먼저 와 있을 터인데 와도 된다는 것이었다. 2년간 제주에 집을 빌려 기거하는 친구인지라 육지의 벗들은 모조리 그 집을 베이스 캠프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드디어 토요일 오후 광주공항에 도착했다. 키오스크에서 PNR(Passangers Name Record)을 넣고 창가의 좌석을 찾는데 이미 좌석은 나가 버리고 복도쪽만 남아있다. 틀림없이 웨이트 발란스 즉, 기내의 균형 조절을 통한 안전 및 연료 절감을 이유로 막아 놓았을 것 같았다. 가장 저렴한 가격의 티켓을 택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이맘때 제주에 입도하면 가장 설레이는 장면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눈 덮인 백록담이 아른아른

 키오스크의 자동발권을 포기하고 항공사 체크인 코너로 갔다. 모든 서비스가 대면적인 상황에서 이뤄지던 시대를 거쳐 이제 비대면이 일상화된 시대로 적응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임에도 이런 난관 앞에서는 사뭇 애원이라도 해서 비행기 날개가 있는 쪽이라도 창가를 구하고 싶었다.

 아날로그로 최적화된 몸을 디지털로 적응시키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구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라는 것을 공항에서 또 느끼며 항공사 데스크 앞에 섰다. 신분증을 주고 죄송한데 창가에 좀 자리를 배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예상했던것처럼 웨이트 발란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양해를 구한다. 그 말씀을 따라야 젠틀한 것인데 눈 덮인 하얀 백록담이 눈에 어린다. 애라 한번만 더 구차해지자. “정말 창밖의 제주를 보고 싶어서 그래요”. 답은 돌아오지 않고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그리고 “잘 다녀오세요” 라는 인사말과 함께 티켓이 쥐어졌다. ○○A가 보인다. “감사합니다”라며 이제 2층으로 향했다.

 제주행이 절반을 성공한 것처럼 기뻤다. 일찍 자리를 잡고 기내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는데 수염 나풀거리며 하얀 옷을 입은 분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연배로 봐서는 내 또래인데 놀러가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비즈니스는 아닐 것 같은 애매한 차림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인다.

 삽시간에 하늘에 오르고 잠깐 졸았다 눈을 뜨니 비행기의 좌현 아래에는 섬이 보이고 저 멀리 한라산의 하얀 머리가 보인다. 오로지 이 순간을 바라며 지상 승무원에게 아쉬운 말을 보탰는데 그 보람 찾았다.

항공기에서 만난 벗과 함께.
항공기에서 만난 벗과 함께.

 그러다 문득, 제주에 있는 3명의 벗들은 지금쯤 그 산정에서 하산하고 있을 것 같고 나는 또 그들을 시샘하고 있었다. 랜딩 기어가 내려가고 비행기는 바로 계류장으로 가지 않아 공항내부 버스에 오르는데 누군가가 내 가방을 당긴다.

 앗, 아까 수염 더부룩한 하얀 의상의 독특한 그분이었다. 한데 내 이름까지 불렀으니 하며 얼굴을 자세히 보니 제주에서 몇 년째 문화도시와 마을만들기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아닌가. 반가움을 표하며 잠시간 제주에서 이뤄졌던 일들을 복기하는 시간을 공항 밖까지 나오며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섬속의 섬 우도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건승을 빌며 언젠가는 가겠다는 인사로 작별을 고했다.

 여느 때 같으면 렌트카를 빌리러 갔지만 그냥 101번 버스를 기다렸다. 공항에서 김녕까지 버스를 타고 해수욕장 근처에서 친구가 차를 가지고 나오면 조우하기로 했던 것이다.

 잠시 차를 기다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방금 한라산 등반을 마쳤으니 성판악에서 김녕으로 올터이니 거기서 보자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착한 버스의 요금은 현금 3000원이었다.

 교통카드는 더 저렴하다고 했는데 미처 못가져왔으니 요금통에 돈을 넣고 거스름돈을 동전으로 받았다. 자가용 만능의 시대를 접하다 이렇게 버스에 오른것도 얼마만인지 싶어진다.

해국과 일출봉.
해국과 일출봉.

 제주의 정취를 한눈에

 북동쪽으로 향하는 버스라서 창가에 앉아 흘러가는 제주의 정취를 눈에 담아본다. 아직 어둠이 내려오지 않은 시각의 제주지만 모두가 분주하듯 싶다.

 도로에는 제주 허씨들과 하씨들이 모는 차로 가득하고 인도에는 지역민 보다는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아 보인다.

 1시간 20여분을 가니 김녕에 도착한다. 잠시 해수욕장을 둘러볼 욕심으로 걸음을 하는데 벌써 친구가 도착해서 부른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그간 살아왔던 일들을 얘기하는 시간을 이어간다. 제주당근과 귤과 방울토마토가 준비된 테이블에서 막걸리로 만찬을 이어가는 와중에 이날 한라산 등반의 풍경은 모든 이야기를 압도한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눈 쌓인 능선 사이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고, 나 또한 2015년 발에 흙 한줌 묻히지 않고 정상에 안겨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지만 그날의 사진 한 장 한 장 나올 때마다 부러운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앞으로 3일간의 행보를 묻는 벗들에게 이집 주인장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선언했다. 살아온 이야기로 꽃피운 밤이 지나고 여느 때 보다 느즈막히 일어난 나는 몸이 이처럼 가뿐하게 살아나는 기분을 처음 마주했다.

 그게 뭐였을까 스스로에게 의문부호를 던져 보았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듯 몸의 어떤 나쁜 기운이 빠져 나가고 새 기운이 들어온 것 같아 보이는 것인지가 궁금증을 계속 복사해 내고 있었다. 그것은 제주를 빠져 나오는 날 까지 이어진 일이어서 내 인체나 신경계통에 무언가의 전환점이 형성되는 것으로 지금도 자문해 보고 있는 중이다.

 하여튼 가뿐한 기운으로 맞이한 아침은 두시간의 독서 시간을 부여했다. 여행지에 들고간 나의 책은 경기도에서 황해문학으로 편집장으로 계신 전성원 선생님의 “길 위의 독서”라는 책이었다. 70년대생인 그의 인생과 덧대어 1994년부터 편집일을 시작하며 주어진 일과 겪었던 일과 독서를 통해 대입되는 일상과의 연관 속에서 무엇이 문제의 본질이고 그것을 혁파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 책은, 사실 몇 년전에 사두었지만 읽혀지지 않아 이번 여행에 오직 이 한 권만 택한 것이었다. 반드시 다 읽고 출도 하리라는 서원이 내게 있었다. 하지만 책은 절반 정도만 읽고 여행은 끝났고 영암으로 돌아와 작심하고 하룻밤을 지새워 다 읽어낸 책이 바로 길 위의 독서였다.

 삶도 여행도 모두 길 위에서 이뤄지는 동의어니 어디에서 읽는 것이 대수겠는가 싶지만 묵힌 숙제를 끝낸 것 같아 시원한 것이 요즘의 심정이다.

호젓한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
호젓한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

 자연스러움 가득 베인 풍광

 그렇게 시작한 아침은 열시 무렵 넷이서 한 차를 타고 성산 일출봉 오조리 마을 일대를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제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걷는 오조리 일원을 제주 올레길의 시작점이기도 한 구간이다.

 두시간여를 작정하고 걷는 길은 풍광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발걸음도 많지 않아 자연스러움이 가득 베여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오조리 양어장 일원을 한바퀴 도는 길은 아직 겨울인지도 모르는 해국이나 털머위꽃들이 여전히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구역의 호수에는 쇠닭이나 고방오리, 청둥오리, 가마우지 등 철새와 텃새들이 둥둥 떠다니고, 저 멀리 뭉게구름 곁으로 성산일출봉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올레길의 순례가 이곳을 중심으로 왜 시작되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느릿하게 걷는 길 위에는 마주치는 사람들 마저도 없어서 호젓한 기분을 가질 수 있었고, 곳곳에 눈길을 주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황근나무가 달고 있는 씨앗주머니.
황근나무가 달고 있는 씨앗주머니.

 특히나 내 발걸음을 잡아둔 것은 “황근”이라는 나무와 씨앗주머니였다. 한국 토산의 노란 무궁화라는 별칭을 가진 황근은 따뜻한 남쪽 바닷가 근처에 자라며 소금기가 많아도 이를 극복하고 척박한 바위틈에도 뿌리를 내리며 강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다. 하지만 그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멸종 위기식물로 지정했는데 작년에 해제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만큼 이 종의 보호와 유지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황근나무 꽃.
황근나무 꽃.

 파도가 잠들어있는 바닷가 풍경이지만 풍랑 심한 날이면 황근나무는 온통 소금물을 뒤집어쓸 그런 자리에 서식지를 두고 있었다.

황근나무 밀식지.
황근나무 밀식지.

 이 정경을 찬찬히 보다가 나는 일본 오키나와의 맹그로브 숲을 떠올렸다. 한국형 무궁화이자 한국형 맹그로브숲이 바로 황근나무 밀생지 아닌가 라는 생각 말이다. 아직 자투리를 떨어뜨리지 않은 씨앗 주머니를 따서 열어보았다.

 바닷가의 갯콩 같은 열매가 그 내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작은 씨앗이 발아해서 2미터에서 3미터에 이르는 나무를 바닷물 만나는 곳에 살아남게 하는 강인한 생명체로 존재케 한다는 것이 실감나는 현장이었다. (이어집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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