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방 우리책들] ‘손 없는 색시’(2019, 고래뱃속)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찌저찌 삶을 잘 이어가다보면 필연적으로 결핍이 없는 생애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결핍을 극복한 삶과 극복하지 못한 삶을 나누는 명확한 선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할까? 오늘은 이런 질문들을 우리에게 남기고 앞으로의 생으로 나아가는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손 없는 색시’(2019, 고래뱃속)는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된 그림책이다. 평면적 그림이 아닌 입체적 공간을 담은 사진 작품들로 이야기의 형상을 구현한다. 2001년 춘천인형극제에서 ‘신밧드’를 올리며 창단한 인형극단 ‘예술무대산’이 동명의 희곡을 선보였는데, 무대에서 연기자들이 직접 인형을 움직여 구현했던 공연과 달리 책에서는 인형과 인형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지금껏 읽고 소개했던 그림책들은 단일한 작가가, 혹은 글작가와 그림작가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손 없는 색시’는 이와는 다르게 극작가 경민선의 극본, 예술감독 류지연의 인형과 장치들로 꾸려진 작품이다. 그리하여 왠지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림을 그린, 이야기를 쓴 작가가 겪었을 창작의 순간들보다도 ‘인형극’이라는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경험했을 순간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들에서 연기자-인간들을 제외하고 이야기-인형들만을 남긴 의미에 대해서도 말이다.
오래된 민담의 구성을 차용한 것처럼 ‘손 없는 색시’의 이야기는 어딘가 친숙한 점이 있다. 주인공 ‘색시’와 뱃속의 아이, 그리고 그런 ‘색시’를 두고 전쟁터로 떠난 남편. 사계절이 지나고 아이가 태어날 즈음, 전쟁터에서 죽은 남편을 담은 소포가 고향으로 돌아온다. ‘색시’는 너무도 슬퍼 울고 또 울었다. 그러자 ‘색시’의 손이 지겹다며 그를 떠난다!
손!
색시한테 소리친 건 색시 몸에 붙은 손이었어!
색시의 손은
색시의 아픈 눈물과
색시의 아픈 가슴과
색시가 만지는 모든 것이 싫어졌다면서
색시의 몸에서 뚝 떨어져 나오더니!
색시한테서 도망쳤어!
“난 내가 만지고 싶은 걸 만지러 떠날 거야!”
‘손 없는 색시’ 중에서.
손이 떠나간 그 봄날 아이가 태어났다. ‘색시’는 남편과 손을 잃은 부인이자 엄마가 된다. 태어난 아기는 뱃속에서부터 엄마의 슬픔을 너무 많이 들었다며 잔뜩 늙은 할아범 같은 모습이다. 할아범 아기를 달래던 ‘색시’는 자신의 손이 “열 고개 너머 동그란 우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색시’의 손에도 있었고 할아범 아기의 손에도 있는 붉은 점이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할아범 아기의 이름은 ‘붉은점’이 되고, ‘색시’와 ‘붉은 점’은 색시의 손을 찾아 가기로 한다.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오기까지 두 사람은 꼬박 일 년을 지냈다. 그 사이 색시의 손이 살구를 잔뜩 훔쳐간 살구밭을 지나고, 전쟁통에 잃은 딸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해골을 모으는 할멈을 만나고, 폭격과 총알 때문에 내도록 눈물을 흘리는 땅을 도와주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살아있는 존재들을 만나고, 공감하고, 함께 울었다. 그리곤 다시 봄, 마침내 동그란 우물을 찾아 색시의 손을 찾았으나…
손이 너무 오래 떠나 있던 바람에,
손이 떠나간 자리에 새살이 돋아
상처가 아물어 버렸어.
색시와 손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었지.
‘손 없는 색시’ 중에서.
그리하여 색시의 손은 우물에 빠진 ‘붉은점’을 구하고 사라진다. 그 후 “색시는 별일 없이 늙었”고, “붉은점은 제멋대로 컸”고, “세상은 한동안 그럭저럭 굴러갔”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색시’는 ‘붉은 점’과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손은 없는 채로 웃으면서.
‘색시’는 작품에서 내내 색시로, 또 엄마로 불리지만 이름으로 불리지는 못한다. ‘색시’의 손은 지금껏 그가 내리누르고 살아야 했던 욕망들의 결집체다. 만지고 싶은 것을 만지고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욕망으로 떠나갔다가 다시금 ‘색시’에게 돌아오지만, 수많은 슬픔과 아픔을 겪고 보고 공감하며 변화한 ‘색시’와 다시 한 몸이 될 수는 없었다. 그 손은 마지막으로 ‘붉은점’의 늙어버린 모습들, 어린날의 결핍을 가지고 사라진다. 다시 일반적인 아기의 모습으로 돌아간 ‘붉은점’을 보며 ‘색시’는 기뻐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도 색시의 손은 자기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위하여 희생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손, 명확한 욕망을 가진 손이 사라진 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결핍이기도 하지만 변화이기도 하다. 결핍으로 인한 변화, 그러한 변화에 적응해 ‘나만의 것’이 되는 삶의 형태란 항상 멋지고 진취적이기만 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 희생해야 하는 입장에 서있는 존재일수록 그렇다. 전쟁이 활보하고 아픔이 만연한 세상에서 ‘색시’는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고 또 적응한 것이다.
시대가 바뀌며 우리는 점점 더 우러러볼 대상을 찾는다. 당당하고 앞서나가는, 타인에게 귀감이 되고 멋들어진 모습들을 추앙하고 박수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가끔은 성과주의가 채 비추지 못하는 가치들이 있다.
없이도 이어지는 생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것을 비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색시’는 앞으로 손 없이 살아가야 하지만, 이미 다 아문 자리에 억지로 손을 바느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떤 아픔은 그런 방식으로 아물고, 아문 것은 그 자체로 모양이 된다. 우리 사회는, 아니, 그렇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이토록 낯선 형태로 아문 생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문의 062-954-9420.
호수 (동네책방 ‘숨’ 책방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