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곰순의 귀촌일기](79) 제행무상이라,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
곰돌곰순은 한재골로 바람을 쐬러 가다 대치 마을에 매료되었다. 어머님이 다니실 성당이랑 농협, 우체국, 파출소, 마트 등을 발견하고는 2018년 여름 이사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마당에 작물도 키우고 동네 5일장(3, 8일)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막걸리에 국수 한 그릇으로 웃음꽃을 피우면서 살고 있다. 지나 보내기 아까운 것들을 조금씩 메모하고 사진 찍으며 서로 이야기하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면 좋겠다 싶어 연재를 하게 되었다. 우리쌀 100% 담양 막걸리, 비교 불가 대치국수가 생각나시면 대치장으로 놀러 오세요. <편집자주>
집안일을 끝낸 후 커피 한 잔 들고 토방에 나왔다가 모처럼 겨울 햇빛이 따사로워 마당을 거닐어 봅니다. 산책길을 따라 거닐면서 여러 곳을 살피던 중 토방 데크와 그네, 파고라 계단이랑 바닥이 햇빛에 칠이 바래지거나 벗겨진 게 눈에 띕니다.
작년 가을 곰순이와 마당을 거닐며 가을 햇볕이 뜨거울 때 페인트칠을 하기로 계획했던 게 떠오릅니다. 이사 온 다음 해 설치했던 토방 데크는 당시 밤색 페인트를 칠했는데, 몇 년 후 마당 한쪽에 파고라를 설치한 후에는 모두 투명한 오일 스텐으로 칠하자고 이야기했더랍니다.
그런데 10월 중순 왼발 엄지발가락 개방성 골절로 한 달 이상 깁스하며 다니다 보니 어느새 추운 겨울이 되어 버렸습니다. 깁스를 푼 후에도 아침 운동은 꿈도 못 꾸고 산책 정도만 할 수 있었지요. 걷기도 쉽지 않은 게 조금 걷다 보면 통증이 느껴져 날마다 조금씩 거리와 시간을 늘리는 데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집안일은 그런대로 하지만, 마당 일은 엄두를 못 냈겠지요.
처음에는, 오른발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하며 느긋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일어난 사건이야 지나버린 과거이고, 어쩔 수 없는 건데,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인 게 참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1주일 정도만 병원과 집에서 쉬고, 이후에는 운전을 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학원을 다니고, 목발을 짚고 다니며 수업을 했습니다. 모임 활동도 목발을 집고 다니며 평소처럼 했겠지요.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과 염려를 들을 때마다, 왼발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오른발이 아니어서 운전이 가능하고, 손이 아니어서, 기타도 계속 칠 수 있다고, 좋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을 했겠지요.
그런데 깁스를 풀고 난 후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쫓기게 되었습니다. 한두 달 정도 지나면 평소처럼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낙관적인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사고 후유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하는 말과 시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보통 한 달이면 다 나아. 그냥 생활하면 돼”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상하네, 보통 그 정도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텐데”하는 말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1, 2주마다 정기검진 받으며 뼈가 붙는 과정과 치료 과정에 대해 사람들에게 해명을 하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게, 그때마다 가슴 속에 화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데도,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무시할 수 없었기에, 언제까지 이해를 구해야만 하고, 해명해야 하는지. 생각해서 하는 말인 것도 알고, 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참으로 다행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점차 내 안의 화를 다스리는 에너지로 쓰게 되면서, 아, 이런 것도 후유증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시간들. 생업은 해야 하고, 모임은 해야 하니, 사람을 안 만날 수는 없고, 그럴수록 털어버리고 싶어도 털어버리지 못하게 되는, 반복과 반복의 악순환의 고리들.
곰돌곰순의 시간은 함께 가다 보니 그런 시간들을 공유하면서 겨울을 맞이했겠지요. 늦가을에 심어야 할 마늘과 양파, 겨울무, 월동 배추와 쌈 채소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계획했던 페인트칠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폭설도 일찍 내린 12월이 되어서야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어르신들은 이미 늦었다고 하지만, 텃밭에 씨앗들과 마늘, 양파 등을 심었습니다. 곰돌곰순도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필요에 맞게 조금이라도 자라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다행스럽게 추운 날씨에도 쌈 채소들과 겨울무, 월동배추가 자라기 시작해서 겨울 아침 식단으로, 물김치 재료로 쓰고 있습니다. 냉이도 자라고 있어 놀라서 물어보니 곰순이 이미 11월 경에 심은 거라고. 다행히 잘 자랐다고. 곰돌이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텐데. 해가 바뀌어 아침 운동을 마치고 밭에서 냉이 한두 뿌리, 겨울무 한 뿌리, 배춧잎 몇 장, 쪽파 한 뿌리를 뜯고 보면, 겨울을 나면서도 얘들은 왜 그리 싱싱한지, 혹한 속에서도 이렇게 자라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내일 하면 되지, 머가 그리 급해?”
회복과 힐링의 시간을 보내면서 귀촌 이후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내일 하면 되지, 머가 그리 급해?”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일 한다고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어.”로 시작해서, “세상을 좀 느긋하게 바라보고 살어. 좀 늦게 시작한다고 세상이 당장 망하지는 않잖어.”, “세상이 딱, 딱, 그렇게 맞춰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여. 너무 그렇게 팍팍하게 살지 마아.”로 끝나는.
사람들은 해가 바뀌고, 한 살 나이를 더 먹고, 또 그만큼의 각오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게 올해는 좀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거지요. 여유,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 삶에 휴식과 여유, 이완의 리듬이 없다면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고, 참 멋없는 삶이 되겠지요.
하지만 이미 늦어서 할 수도, 볼 수도, 되지도 않는 일이 있는 법이지요. 추운 겨울에 심어, 아주 늦었음에도 텃밭 채소들을 맛보고 있지만, 마늘은 올라온 게 말 그대로 가뭄에 콩 나듯이 하고, 해마다 이맘때 아침 식단에 올라왔던 유채잎은 아예 싹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올봄 텃밭에서 유채꽃을 볼 수는 없겠지요.
사람마다 삶의 리듬이 다르고, 시간 개념과 시간 리듬도 다릅니다. 도시의 리듬과 농촌의 리듬 또한 다릅니다. 거기에 귀촌한 사람들의 리듬은 또 다릅니다. 여기에 도시에서뿐 아니라 귀촌해서도 여러 활동을 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개인차까지 더해지면, 마치 ‘N개의 리듬’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쯤 되면 “내일하면 되지”라는 말이 항상, 모두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전가의 보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달랐듯이 ‘내일’ 또한 오늘과 결코 같지 않을 거니까요.
“내일이면 늦으리!”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곰돌이는 영원한 것은 없고,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없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축구 국가대표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강물은 쉼 없이 흘러갑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한번 흘러가면 두 번 다시 내 인생에서 찾아오지 않을 시간입니다. 이 생각을 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벌떡 일어나졌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쏘아 버린 화살”이라고도 하고,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도 하는 거겠지요. 오죽했으면 가수 임주리도 “내일이면 늦으리, 꼭 늦으리”라고 했을까요. 살다 보면, 그 하루가, 그 한순간이, 그 한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던가요. “이번 일만 끝나면 ….”이라는 말로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미루었는지, 하고.
이 시간이 영원한 거 같고, 영원할 거라고 믿고 싶지만, 지나 보면 똑같은 일상처럼 보이는 하루의 시간 속에 비추어지는 내 모습 또한 변하고 있겠지요. 자신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발끝에서 시작해 온몸을 휘감아 심장을 전율케하는 “한순간”의 감동에 취해 “흐름”을 놓치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는데.
시간 또한 음악처럼 흐르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간이 흐르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음악의 선율처럼 고정리듬이 있는 구간도 있고, 변주도 있고, 세기와 강세도 달라지지요. 오케스트라의 협연은 이 모든 걸 보여주고 있는데,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같은 주제 리듬을 연주하고 있더라도,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원고를 마감하고 차 한 잔의 여유를 느끼며, 평가하고 의논하며 글을 계속해서 다듬고 있는 이 순간, 제 글도, 곰돌곰순이도 변하고 있겠지요.
곰돌 백청일(논술학원장), 곰순 오숙희(전북과학대학교 간호학과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