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의 무대읽기] 연극 '판도라의 상자'
권호웅 원작 각색…대학생 극단 무대 형상화 아쉬워

연극 ‘판도라의 상자’.
연극 ‘판도라의 상자’.

 2024년 2월 23일부터 24일 이틀간 ‘민들레 소극장’에서는 ‘판도라의 상자’라는 작품이 무대에 올라갔다. ‘전남대학교 극문화연구회’(이하 전대극회)의 제123회 정기 공연이었다. 원작은 권호웅의 ‘낙하산’이라는 작품인데, 전대극회 소속 대학생들은 제목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바꾸고, 약간의 각색을 가했다.

 권호웅의 ‘낙하산’은 1999년이 시간적 배경이다. 즉, 대한민국에 1997년부터 시작되었던 외환 위기(일명 IMF)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유례없는 국가부도의 날을 견디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2024년에 공연하는 대학생 극단의 생각과 무대 형상화가 무척 궁금했다.

 막이 올라가기 전 무대는 어느 가족의 원룸아파트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는데, 낙하산을 그린 것 같은 아이의 서툰 그림 한 장이 가족사진 위에 붙어 있고, 따로 조명을 받고 있었다. 아마도 학생들은 이 그림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이 시작되면 그림은 자취를 감추고,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이가 있는 단란한 가족사진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낙하산’은 빈집털이를 시도하는 좀도둑 세 쌍과 1인 다역을 하는 배우 한 명이 나오는 극이다. 전대극회의 ‘판도라의 상자’에서는 60대 커플에서 여인(육례)을 빼고 10대 청소년(일두와 이정)과 30대 부부(삼식과 사연), 나이 든 전과자(오철)만 나오는 것으로 희곡을 정리했다. 학생들이 공연하기에 알맞게 대본을 수정한 것은 칭찬할만한 점이었다. 육례라는 캐릭터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처리했는데, 극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별로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20대 초반의 아마추어 연극 집단인 대학생들이 하기에는 아무래도 작품이 무거웠다. 원작은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재미있게 잘 풀어낸 수작이었는데, IMF를 견디며 결국 범죄(빈집털이)까지 저지르게 되는 인간 군상을 표현해내야 하는 지점에서 전대극회는 원작을 많이 걸러냈다.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표현한 부분만 걸러내다 보니 연극이라기보다는 ‘개그콘서트’처럼 느껴졌다.

 ‘개그콘서트’도 잘 짜인 구성에 연기가 출중하면 무척 재미있다. 하지만 억지스러운 상황에 진실하지 않은 연기로 관객을 웃기려고만 들면 보는 사람이 힘들다. 이번 ‘판도라의 상자’는 삶을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짙은 페이소스는 희석되고 우연히 같은 집을 털게 된 좀도둑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만 남았다. 폭력적인 집안에서 탈출한 가출 청소년의 애환이나, 트럭에서 갓난아기를 재워야 하는 30대 부모의 심정, 아픈 아내의 수술비가 급한 나이 든 남자의 절박함을 2024년의 젊은 그들에게 이해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

 하지만 연극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예술이고, 특히 내(배우)가 아닌 다른 자아(캐릭터)를 보여주는 예술이지 않은가. 배우가 본인이 아닌 캐릭터로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얘기를 전달할 때는 그래서 막중한 책임감 또한 따르는 것이다. 배우의 연기가 단순한 흉내 내기나 모방에 그치고 만다면 관객이 극장까지 찾아가서 공연 한 편을 보는 의미가 사라질 것이다. 배우의 연기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관객은 그 진정성을 통해서 작품 하나를 제대로 감상하고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러시아의 배우이자 연출가인 스타니 슬라브스키는 그의 저작 『배우 수업』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역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려면 우선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다음에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또 발휘해서 자료의 미비함을 보완하라. 그래야 비로소 실제 인생과 유사한 생명력을 얻게 되어, 어려움 없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자기 감정은 잊어버려라. 내적 조건이 갖추어지고 그게 진실한 것이면 감정은 저절로 표면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번 전대극회의 ‘판도라의 상자’는 ‘재미있는’ 혹은 ‘웃음을 주는’ 무대를 만들겠다는 마음이 커서 원작에 있는 상황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소홀히 한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지 극 후반부에는 사회적 메시지를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직접 투척했다. 극을 보고 난 후 생각에 잠기게 하고, 곱씹게 하면서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하지 않고 그렇게 직접적인 방법을 쓰니, 상대에게 자신의 생각만 주입하는 나이 든 세대의 일면이 떠오르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전대극회의 공연이 진정성 면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었고, 프로가 아님에도 프로처럼 연기하고 무대를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이번 공연은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사회를 비판하고, 뭔가 메시지를 주는 연극을 만들려고 했던 그 마음은 높이 산다. 더구나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그 웃음 속에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연기한 부분에는 진심으로 박수 치고 싶다.

 누구나 처음은 있다. 이번 ‘판도라의 상자’는 선인영(화학교육과 20) 학생이 연출을 맡았는데, 그의 첫 연출 작품이다. 원작 희곡과 다르게 각색한 곳이나 무대의 디테일한 부분에서 그만의 색깔이 강하게 드러난 점은 칭찬하고 싶다. 어쩌면 몇 년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희극의 대가가 되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희극과 웃음의 상관관계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이 고찰하고 연구하면서 성장하길 바란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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