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작은책들] '첫눈에 반한 사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첫눈에 반한 사랑' 표지
'첫눈에 반한 사랑' 표지

 살을 에는 바람 불어와 바깥에 나서기 어려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 월이 반쯤 지나갔다. 광주는 남쪽이라 그런가 벌써 해가 높이 떠 공기가 따스한 날들이 있었다. 겨울날에는 아무리 날이 좋고 구름이 없어도 온기가 전해지지 않았는데 봄이 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봄이 온다고 해서, 날씨가 풀리고 따뜻함이 피부로 느껴진다고 해서 들려오는 소식들마저 그런 건 아니다. 사람들은 헤어지고, 반목과 불만이 세계의 이치와 같은 것은 계절에 따라 오고 가지 않는다. 그럴 땐 꼭 한 번씩 의식적으로라도 돌아보아야 한다. 정말로 그것 뿐일까 하고, 지난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

 ‘첫눈에 반한 사랑’(2023, 청어람미디어)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쓴 동명의 시에 베아트리체 가스카 퀘이라차가 그림을 그린 작품이다. 폴란드 시인과 이탈리아 일러스트레이터의 협업은 ‘북유럽 그림책’이라는 분류에 익숙한 독자라면 제법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시가 그렇고 그림의 선이 그어주는 마냥 평범하거나 예쁘지 않은 경계가 그렇다.

 제목 그대로 사랑의 순간을 다루는 시다. 작가는 간결하고도 확실한 어조로 전혀 몰랐던 사람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이 실존하는 것 같은지를 묻는다. 하지만 이것은 염세적으로 사랑의 진실성을 시험하거나 비웃는 질문이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순간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우리의 사랑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면, 혹은 그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의 주변에 알지 못한 채 맴돌고 있었다면, 그것이 과연 그저 첫눈에 반한 운명적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아주 옛날부터

 우연이 그들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너무나 이상하겠지.

 우연은 아직

 그들을 위해 운명으로 바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을 가깝게 했다 멀리 했다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가

 웃음을 참으며 풀쩍 뛰어 옆으로 비켜 주었던 것이다.

 신호도, 징조도 있었지만

 그럼 뭐하나, 읽지 못하는걸.

 ‘첫눈에 반한 사랑’ 중에서.

 운명적인 일은 제법 아름답게 포장된다.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발상은 매혹적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완전한 우연, 또는 행운으로 나에게 대가 없이 찾아온 기회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렇다면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길 수 있을까? 그림책 초입에서 작가는 ‘그들을 이어준 것은 갑작스러운 감정이라고 둘은 확신했다’는 문구를 집어넣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연애에서, 하물며 대중 매체 속 연애에서 그려지는 확신을 아름답게 여긴다. 그렇기에 ‘불확실성은 더욱더 아름답다’는 표현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시야를 잡아보기를 제안한다. 모두가 쉽게 만족하는 사랑 이야기나, 지루하지 않고 반짝이는 이야기들에서 고개를 돌려,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것들을 들여다보자고 말이다.

 작가의 눈을 통해 본 이 세상은 낭만이 가득한 세계다. 길을 걷다 스쳐 지난 사람, 잘못 걸린 전화에서 들려오던 목소리, 그런 우연과 우연들이 제대로 수신되거나 인지되지 못한 채 켜켜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인연의 둑을 터뜨린다. 지나간 것들을 차마 모르는 우리는 그 모습에 감탄하며, 나의 지루한 삶에도 운명적 사랑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긴 고민 없이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경험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모든 시작은 다만 다음 편으로 이어질 뿐, 사건의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강렬한 운명적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리하여 확신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랑은 그 때부터 시작이다. 우리는 운명 속에서도 불확실을 마주하게 되고, 그 불확실성에 고민하며 바닥을 구르기도 해야 한다. 이것이 삶이다. 그것도 아름다운 삶. 운명이 내게 오지 않아 슬픈, 운명이 영원히 확실하지 않아 슬픈 세상이 아닌, 일상 구석구석에서 낭만을 찾는 일을 제안하는 시인이 있는 세상이다.

 문의 062-954-9420

 호수 (동네책방 ‘숨’ 책방지기)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