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크레인 점거한 61명의 노동자들

올해 창간 20주년 특집 중 하나로 광주드림은 역대 취재기·뒷얘기를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그때’ 광주드림에 실려 지역사회 큰 파장을 일으켰던 기사들이 어떻게 작성됐는지 이면을 알려주는 읽을 거리입니다. 독자들에게 제공된 정제된 기록으로서 기사가 아닌 ‘비사’라 할 수 있는 정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한 편의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해당 기자들이 감당한 수고의 일단도 느껴볼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취재기자 관점에서 정리한 기록은 2018년 본보가 출간한 ‘호랑이똥은 멧돼지를 쫓았을까-광주드림 취재기’ 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순천 현대하이스코 정문 앞에서, 농성자들에게 음식과 물을 전달하려던 가족들을 회사 측이 저지하고 있다.  광주드림 자료사진.
순천 현대하이스코 정문 앞에서, 농성자들에게 음식과 물을 전달하려던 가족들을 회사 측이 저지하고 있다. 광주드림 자료사진.

 광주드림이 창간한 지 1년여의 시간이 흐른, 2005년 10월의 마지막 날. 시민자치부 황해윤 기자는 출근하자마자 바로 위 선배를 닦달하기로 마음 먹었다. 얼마 전부터 계속 마음이 순천 쪽으로 가고 있었던 터였다.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61명이 타워크레인을 점거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이어 몇일이 지났지만 사측의 봉쇄로 물과 음식 반입이 끊기고 경찰의 강제진압이 예고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광주드림은 ‘광주’에 집중하자는 취지로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사안을 직접 취재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저 통신사 뉴스 등으로 짤막한 소식들만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황 기자가 보기엔 순천 공장 사태가 너무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고, 순천 공장의 긴박함과는 다르게 광주는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무엇보다 그 현장에 서 있고 싶었다.

 10월31일 아침, 황 기자는 베팅하는 심정으로 당시 사수였던 윤현석 기자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아침 회의 보고 전이었다.

 “선배,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 상황이 심각한데요. 거기 현장에 한 번 가고 싶어요.”

 왜 가야하는지 왜 가고 싶은지 주저리 주저리 풀어놓는 이야기를 듣더니 윤 기자는 “좋아, 가게 해줄께. 기다려”라고 시원스런 답을 남기고 오전 데스크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십여 분 후 회의실에서 나온 윤 기자가 말했다.

 “가자. 준비해. 대신 운전은 니가 해라.”

 오호라. 이야기가 잘 되더라도 혼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선배까지 든든하게 동행해 준다니 황 기자로선 입사 이후 가장 신이 났던 순간이었다.

 당시 순천까지 가는 도로가 썩 좋지 않았고 운전하기도 험했지만 다시 오기 힘든 기회였다. 황 기자와 윤 기자는 그렇게 그날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타워크레인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장 앞에 섰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공장은 요새같았고 수많은 경찰병력이 공장을 옹위하고 있었으며 막아선 경찰 앞에선 가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점거 농성에 들어간 지 8일째를 넘어서고 있었고 가족들과 동료들은 사측에 식수나 음식을 전달하게 해달라며 시위를 벌였다.

 “현장의 광경은 말 그대로 비현실적이었다. 사측이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들과 경찰이 같은 곳에 서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경찰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 노동자가 아닌 공장이라는 게 내 눈에는 굉장히 이상해보였고 충격적이었다.”

 황 기자의 회상이다.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원청회사로부터 작업지시를 받는 등 원청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지만 형식적으로 하청업체 소속. 말이 하청업체지 사실 불법파견이나 다를 바 없었다.

 2005년 6월14일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차별, 고용불안 등을 해결해보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하지만 실제 사용자일 수밖에 없는 현대하이스코는 직접 사용자가 아니라며 대화에 나서지 않고, 권한이 없는 하청업체들은 노조를 설립하자 곧바로 폐업, 제대로 협상 한 번 해보기도 전에 조합원 120여 명이 사실상 해고됐다.

 7월17일 노조 지회장이 근무하는 업체 폐업을 시작으로 한 달여 동안 차례로 총 4개의 하청업체가 폐업했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 갑작스런 폐업이 이뤄진 것인데 이를 통해 조합원들만 해고하고 나머지 비조합원들은 이름을 바꾼 새로운 업체로 고용 승계되는 식이었다. 노조를 솎아내기 위한 위장폐업이라고 볼 수밖에.

 절박해진 노동자들은 급기야 10월24일 새벽 1시30분 크레인을 점거했다. '원직 복귀'와 '노조 인정' 등을 주장하며 20m 높이의 크레인에서 시너 등을 소지한 채 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윤 기자와 황 기자가 현장에 있었던 그 날을 특히나 긴장감이 팽팽했고 많은 사람들이 중재를 위해 현장에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 광주사무소 직원들이 찾아와 공장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경찰을 통해 되돌아온 사측의 대답은 “안 된다”였다.

 이후 당시 민주노동당 단병호·심상정·이영순 의원 등이 공장 정문을 찾았다. 농성자들을 위한 식료품을 전달하기 위해 바리케이트 앞으로 나아간 심 의원이 당시 정인균 순천경찰서장에게 따져 물었다.

 “경찰이 왜 안에 있어야 되는 것이냐. 기업의 재산은 지키면서 노동자의 목숨은 내팽개치느냐”고 따졌지만 역시 ‘안 된다’는 답변만 있을 뿐이었다.

 다음엔 허준영 경찰청장이 전용헬기를 타고 공장에 도착했다. 그는 크레인 점거 농성중인 해직근로자들에 대한 대책회의를 가진 뒤 “사전에 충분히 대화로 농성을 푸는 노력을 하지만 안 될 경우 불시 진압이 불가피하다”며 “인도적 차원에서 식료품 제공은 사측에 권유해보겠다”고 말했다.

 “농성자 가족, 순천시장, 인권위 직원, 국회의원 등이 와도 열릴 줄 모르며 ‘치외법권’지역처럼 굳건한 하이스코 공장 문은 경찰에게만 자유로웠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이 사태의 근본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어떤 노력도 없는 가운데 그들의 희생만 강요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당시 윤 기자와 황 기자가 보도한 기사 마지막 내용이다. 마감 시간 때문에 서둘러 편집국으로 복귀해야만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 때의 경험은 꽤나 강렬했다. 그리고 현장에 가게 해줬던 선배를 늘 고마워했다. 그 뒤로 10여 년이 훌쩍 흘렀고 그런 현장들을 많이 만났다. 그 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때는 좀더 사측이 무식해도 됐었던 때였고, 지금은 세련돼졌다는 정도? 여전히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 같은 일들이 다양한 버전으로 변주돼 벌어지고 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담당 기자로 일해온 된 황 기자의 소회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현대하이스코 농성현장]서러움 덩어리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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