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중국차(茶) (43) 백차(白茶) (1) 또 하나의 사기극
생산량 겨우 1% 백차, ‘신비’로 무장하다
필자가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백차의 생산량은 겨우 1% 남짓에 지나지 않았고, 차 애호가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처지의 차였다. 그런데 대략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너도나도 마치 엘도라도를 발견한 것처럼 백차의 효능과 함께 신비함을 칭송하고 다녔다. 소위 ‘1년 차(茶), 3년 진(陳), 5년 약(藥)’ 혹은 ‘1년 차(茶), 3년 진(陳), 7년 보(寶)’를 마법의 주문처럼 외치고 다니는 것이었다.
현지에서 차를 공부하는 필자 역시도 그들의 그 당당함에 압도당해 “예로부터 어떤 것들을 소개할 때는 약간의 과장도 섞이는 것이겠거니”라고 여기며 넘어갔다.
시간이 더 흘러 2014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다음 약 3~4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한국의 차 시장에도 백차가 소개되면서 어김없이 떠돌이 ‘약장수’들의 주문이 들려왔다. “1년 차, 3년 진, 7년 보….”
이는 가뜩이나 눈 가리고,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차인’들이 주를 이루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인 한국의 ‘차판’(보통 업계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에서는 더 큰 반향으로 다가왔다. 그 반향은 어김없이 쏠림현상으로 나타나며 차인들 사이에서는 백차를 모르면 차인도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연간 생산량 300만t을 웃도는 중국차 가운데서 1% 남짓의 초라한 지위에 있던 백차는 어떠한 이유로 ‘소금에 절여놓은 물고기가 펄떡이며 몸을 뒤집는다’라는 함어번신(鹹魚翻身)의 기적을 이뤄냈을까?
이를 알자면 먼저 중국의 경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화상(華商) 가운데 극명하게 대비되는 양극단의 부류가 있다. 안휘성(安徽省)을 본거지로 한 휘상(徽商)과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절강성(浙江省)의 온주(溫州) 상인들이 그들이다.
먼저 휘상들은 자식이 세상으로 나가 장사를 시작하기 전 먼저 공부를 시킨다.
그 교육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어서 세간에서는 “양심을 파는 상인”으로 인식되어 믿고 거래하는 곳이 늘어나며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 후 휘상들은 여타의 상인들과는 달리 외지에서 축적한 부를 갖고 귀향한 다음, 중국 각지의 진귀한 석재와 목재 등의 건축자재를 사들여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을 세워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는 선순환으로 이어져 적지 않은 숫자의 인재들을 배출하게 되었고, 우리의 실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도 휘상의 후예이다.
온상(溫商)은 “동방의 유대인”으로 불리며, 단결력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그 단결력이 좋지 않은 곳으로 쓰이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과 같은 꼴이 나기 십상이다.
이들은 중국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적지 않지만, 대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면서 곳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의 매점매석, 부동산 투기 등 여러 방면에서 악명을 떨친 바 있다.
차 업계도 이들의 영향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해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차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격을 폭등시켰고, 그들의 눈에 6대 차류에서 마지막 남은 대상은 백차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 큰 값어치가 없는 차의 가격을 폭등시키려면 세간의 이목을 집중 시킬만한 기폭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가 바로 1년, 3년, 7년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 말이 너무 의심스러워하다가, 작심하고 중국 사이트를 검색해 봤다. 결과는 그 어디에서도 이 말의 출처를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출처가 없다는 것은 곧 이 말은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고, 그것이 통상적인 과장의 선을 넘어 허무맹랑의 지경에 이르면 이를 사기극이 아니면 뭐라고 할 것인가?
물론 차 가격 폭등에는 △맛은 좋은데 생산량이 너무 적거나 △무이암차처럼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고 △개혁개방 이후로 급격히 증가한 중국인들의 소득과 함께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인해 탄생한 신흥부호들은 어지간한 가격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베팅으로 세인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현상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복건성에서 생산된 백차의 대부분은 동남아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들에게 공급하던 용도였다.
화교들은 다른 나라로 건너가서도 자기들이 고향에서 마시던 차의 맛을 잊지 못하여 처음에는 녹차를 수입하였으나 △장기간의 항해와 △비발효차인 녹차를 가공한 후 남으로 갈수록 더워지는 날씨 △봄에 만들어진 녹차가 동남아로 도착할 때쯤이면 여름으로 변하는 계절적인 요인 △중국보다 덥고 습한 동남아 날씨 등으로 인하여 본래의 신선한 맛을 잃어버리기 일쑤였을 것이다.
이에 △봄철에는 어느 정도 녹차와 비슷하면서도 △동남아의 기후조건에서 발효가 일어나도 먹을 수 있는 차를 원하는 그들의 요구사항에 맞춘 백차가 만들어졌고, 그 생산량 대부분은 화교들에게 수출되었다.
다음 회에는 백차의 어떤 점이 필자가 고개를 가로젓게 했는지 설명하도록 하겠다.
류광일(덕생연차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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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광일 원장은 어려서 읽은 이백의 시를 계기로 중국문화에 심취했다. 2005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사범대학에 재학하면서 덕생연차관 주덕생 선생을 만나 2014년 귀국 때까지 차를 사사받았다. 2012년 중국다예사 자격을, 2013년 고급차엽심평사 자격을 취득했다. 담양 창평면에 중국차 전문 덕생연차관(담양군 창평면 창평현로 777-82 102호)을 열어 다향을 내뿜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