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철 치사사건으로 막이 오른 1987년. 5공 군사독재는 범국민적 6월 항쟁으로 정권이 흔들리자 계엄령 카드를 빼들었다. 실제 군 투입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1980년 광주의 악몽을 떠올린 미국이 반대하고 군부 일각에서도 심각한 우려를 보이자 막판에 포기한다.

 대신 전두환 집단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재야에 있던 김대중을 사면 복권 시켜 당시 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정권의 예상대로 김영삼과 김대중은 1980년에 이어 다시 각개약진으로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대권을 향해 달려갔다.

 70%를 웃도는 야권 지지 유권자들이 제1야당 후보에 표를 몰아줄 것으로 기대한 김영삼. 호남과 수도권의 우위로 노태우(TK) 김영삼(PK) 김종필(충청)과의 대결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이른바 ‘4자 필승론’의 김대중.

 6월항쟁 기간 중 ‘국민운동본부’로 집결했던 재야 세력도 양김 분열의 파괴적 후과를 고스란히 떠안는다. 문익환 등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비지)와 계훈제 등 야권후보 단일화파(후단), 독자적 민중후보 백기완(독후) 세 조각으로 갈라진 것. 이중 ‘비지’ 그룹이 80% 정도로 압도적 다수였다.

 그해 12월 대선 결과와 이후 우리 역사가 얼마나 먼 길을 우회해 1997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뤘는지는 모두 아는 바다.

 # 3등으로 패배한 김대중은 단일화 실패와 정권교체 무산 책임을 떠안다시피 하며 빗발치는 정계 은퇴 압력을 받는다. 이때 김대중은 누구도 예상 못한 승부수를 던지며 위기 탈출을 시도했다.

 자신이 이끌던 평민당에 ‘비지’ 그룹을 수혈, 완전히 새로운 당으로 탈바꿈시킨 것으로 1988년 2월 문동환, 임채정, 이해찬, 김학민 등 민주화 운동가 98명이 결성한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가 그 대상이다.

 평민연은 지분 50%를 보장받고 들어왔는데, 첫 재야 세력의 제도권 집단입당이었다. 평민연 대표 박영숙은 김대중이 대선 패배로 총재직을 사퇴한 상태여서 평민당 총재권한대행으로 1988년 제13대 총선을 지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었다.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바뀐 뒤 처음 치러진 4·26 총선에서 헌정사 처음으로 ‘여소야대’ 이변이 연출된 것. 김대중은 제1야당 총재로서 정치 입문 이후 처음으로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해찬의 회고(2009년 2월 5일, 폴리뉴스)는 현대 정치사의 중요 변곡점이었던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광주항쟁부터 시작해서. 그쪽(호남)이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굉장한 레디컬리즘으로 흘러가기가 쉽다. 이렇게 되면 정치적으로 굉장한 불균형과 진공이 오겠다 싶어서 평민당을 살려 나중에 (민주세력) 재통합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김대중 총재가 재야 사람들과 같이 안병무 박사 집에서 한번 만나 저녁을 했는데, 그 때 (평민당에서) 의원들이 다 떠나니까 교섭단체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까지 내려갔었다.”

 “김대중 총재가 ‘여러분들이 들어와서 같이한다면 정치를 더 하겠지만, 대선 떨어지고 의원들도 다 떠나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도 정치를 못한다. 같이 정당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없이 당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이 포기할 것이냐를 빨리 결정해주면…(좋겠다)’ 그렇게 요청을 했다.”

 #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된 우원식도 평민연 출신이다. 그는 연세대 재학시 유신철폐 활동을 하다 강제 징집됐고 전두환 치하에선 3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22대 국회엔 윤호중(구리) 김현(안산을) 등이 평민연 입당 동기다. 당 주류가 무리하면서까지 밀었던 추미애 대신 그가 승리한 것에 대해선 민주당에 면면히 흐르는 ‘민주주의 DNA’가 극적으로 표출됐다는 분석이 적지않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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