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작은책들] '그 오월의 딸기' 윤미경
광주의 오월엔 항상 미묘한 공기가 있다. 이곳을 고향이라 느끼는 사람들은 모두 학교를 다니며 주먹밥을 먹은 기억이 있고, 현장체험학습으로 참배를 하러 간 기억이 있고, 가족 혹은 주변인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한번쯤은 있다. 오월엔 축제를 하지 않는 이유, 5·18 전야제의 규모, 사람으로 꽉 막힌 금남로의 풍경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안다.
더 이상 지역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미묘함은 항상 오월에 따라붙는다. 이번 오월을 나는 광주 아닌 다른 지역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계절과 날짜에 대한 긴장감이 없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는 것이 오히려 광주를 더욱 생생히 느끼게 했다. 80년을 직접 겪지도 않은 내가 그 해 5월을 나와 연관있는 일처럼 느끼듯이, 5·18의 이야기를 끝없이 새롭게 자아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작년 5월 18일 초판 1쇄를 찍은 ‘그 오월의 딸기’(2023, 다림) 역시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윤미경 작가가 글을 쓰고 김동성 작가가 그림을 그린 ‘그 오월의 딸기’는 부드럽고 다정한 그림체와 따뜻한 색감으로 어린 주인공 ‘나’의 시점을 그려낸다. 딸기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자라난 ‘나’는 매년 5월 다 물러 팔 수 없게 된 딸기를 바구니를 선물 받는다. 좋은 상태의 빨갛고 예쁘게 익은 딸기는 몰래몰래 밭에서 따먹는 것밖에는 구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80년 봄에는 달랐다.
아름답고 평화롭던 딸기 덩굴 너머로 농사짓는 사람들, 오가는 시민들 대신 시위하는 사람들, 그리고 계엄군과 전차가 지나갔다. 어머니 아버지는 딸기를 수확하지 않았고 ‘나’는 그토록 원하던 딸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몰래 훔쳐먹던 그 딸기의 맛이 아니다. 하늘이 검어지듯 5월이 아파졌기 때문이다.
딸기 장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들이 나의 일상, 나의 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일을 그만두는 식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 거대한 폭풍같은 힘이 광주의 5월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5월 벌어지는 일이 무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왠지 예쁘고 빨간 딸기가 이전의 딸기들보다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부지, 올해 딸기는 참말로 이상하당께요.”
“왜?”
“딸기가 단디, 하나도 안 달어요.”
아빠는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요.
“올해 딸기는….”
아빠는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어요.
“울음소리가 들어서 근갑다.”
‘그 오월의 딸기’ 중에서.
아빠가 한숨을 쉬며 ‘나’에게 대답해줄 때. 그림책은 누군가의 넋처럼, 혹은 열매없이 피어난 꽃잎처럼 탐스런 딸기를 흰색으로 칠해놓은 모습을 보여준다. 흰 딸기 위에는 검은 점 같은 씨앗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졌는데, 아빠가 울음소리를 얘기한 것과는 상반되게 흰 딸기 위 얼굴들은 웃음을 머금은 상태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어떤 가타부타 설명도 없는 행렬과, 외침과, 횃불과,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40년도 어느새 훌쩍 넘은 과거의 이야기가 계속 우리 삶에 스며있고 끝없이 다시 이야기하려고 할 때 그 이유는 추모나 복수심만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감정들 역시 무시할 수는 없대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고통이 크든 작든 사라질 일은 영 요원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많은 젊은 세대가 80년 5월 광주를 살던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몰래 딸기를 따먹으며 즐거워했지만 아무리 달아도 그 달콤함을 즐길 수 없었던 어린 ‘나’의 공포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한 어찌 알겠는가. 이해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살과 뼈를 깎는 기분을 주는 무언가가 항상 도사린다. 이것은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라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이 책에 등장한 ‘나’와 인물들을 애도함을 가장 주요히 여기는 방식의 작업은 오히려 ‘그 때’와 ‘지금’을 과도히 분리하려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하지만 갖은 종류의 고통, 수많은 진폭의 혼란이 있는 세계에서 ‘그 오월의 딸기’같은 책은 그 오래된 이야기를 현재의 것으로 호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똑같이 달고 실한 딸기를 맛이 없다 말할 용기를 가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우리 입 속에선 과연 무엇이 달면서도 달지 않은 이상한 사탕으로 변장해 뒹굴고 있을까. 2024년의 5월이 대답할 필요로 하는 질문이리라. 80년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문의 062-954-9420
호수 (동네책방 ‘숨’ 책방지기)
